주간 정덕현

버라이어티쇼, 다큐 같은 리얼? 드라마 같은 가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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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라이어티쇼, 다큐 같은 리얼? 드라마 같은 가상!

D.H.Jung 2008. 11. 4.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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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보다는 가상설정이 대세가 된 이유

언제부턴가 버라이어티쇼 앞에 ‘리얼’이라는 단어가 붙기 시작했다. 이른바 리얼 버라이어티쇼라는 조어는 사실상 이율배반적이다. ‘리얼’은 현실성을 말하고, 버라이어티쇼는 가상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은 그러나 서로 합쳐질 때 더 큰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드라마처럼 가상이 갖는 판타지를 주면서도 리얼하다면? 리얼한 현실 그 자체를 쇼라는 가상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현실과 가상의 그 애매모호한 지점에 서는 순간, 시청자들의 눈빛은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저거 진짜 같은데?”하는 정도의 리얼리티를 담보하지 못하는 쇼는 이제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

‘패밀리가 떴다’, 가상 설정으로 떴다
‘패밀리가 떴다’는 유난히 캐릭터들 사이의 관계를 그 중심에 세워놓고 웃음을 준다. 천데렐라와 김계모로 불리는 이천희와 김수로, 덤 앤 더머로 불리는 유재석과 대성, 국민남매로 불리는 유재석과 이효리, 윤회장과 이여사로 불리는 윤종신과 이효리, 죽고 못사는 자매로 불리는 이효리와 박예진. 이 관계들은 리얼일까, 가상일까. 분명 그 속에는 각자의 연예인들이 본래부터 갖고 있던 캐릭터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설정 자체는 가상이다. 이 캐릭터들의 관계는 마치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에 등장하는 개그맨들의 설정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라면 그 반응이 ‘개그콘서트’보다는 조금 리얼에 가깝게 보인다는 정도일 것이다.

윤종신과 김수로가 아침밥을 차리는데 유재석을 부려먹는 시아버지-며느리 컨셉트는 그 전형적인 예다. 손 하나 까딱대지 않고 말로만 이것해라 저것해라 하는 윤종신과 김수로에 유재석은 군소리 없이 당해줌으로써 큰 웃음을 선사했다. 그것이 성공하자 다음 소재에 등장하는 것은 윤종신과 김수로가 박예진을 부려먹는 컨셉트다. 이 반복적을 활용되는 컨셉트는 우연적인 상황 속에서 벌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그 상황을 그저 세트로 옮겨오면 그것은 그대로 콩트가 된다.

김종국이 등장해, 단 2회만에 캐릭터를 구축해내는 ‘패밀리가 떴다’는 이 프로그램이 가상설정을 그만큼 많이 활용한다는 것을 거꾸로 말해준다. 프로그램 내내 지속된 김종국과 이효리의 어색관계가 유지되고, 김수로는 김종국과 묘한 긴장관계를 유지시켜주며, 이천희는 되도 않는 경쟁의식을 김종국과 갖고, 대성과 유재석은 스스로 가벼워짐으로써 김종국의 남성적인 면모를 거꾸로 키워주는 이 무차별적인(?) 지원 속에서 사실상 김종국은 그다지 큰 노력 없이도 패밀리의 중심으로 세워질 수 있다.

‘패밀리가 떴다’가 뜬 이유는 바로 이 가상의 설정을 적극 활용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초기부터 가상설정은 캐릭터를 그만큼 빨리 세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가상설정이 갖는 환타지성은 그간 남성 출연자들만 있던 리얼 버라이어티에서 여성 출연자를 기용하면서 더 강화되었다. 밤마다 벌어지는 순위게임은 캐릭터를 세우고, 남녀간의 심리게임을 집어넣고, 또 그를 통해 환타지성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패밀리가 떴다’를 가장 특징 지워준다 할 수 있다.

리얼보다는 가상으로 흐르는 쇼, 언제까지?
이러한 가상 설정의 적극적인 활용은 리얼 버라이어티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무한도전’에서 이미 많이 쓰였던 것이다. ‘무한도전’은 리얼과 가상을 변주하면서 큰 재미를 주는 버라이어티쇼다. 리얼을 강조하는 ‘댄스 스포츠편’이 있는 반면, 설정 자체가 가상인 ‘28년 후’같은 소재도 있다. 중요한 것은 ‘무한도전’은 이 가상과 리얼이 적절하게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매니저가 돼 봐라’편에서 서로 매니저와 스타로 이뤄지는 짝은 설정이지만 그 속에는 매니저들의 실제 상황들도 어느 정도는 녹아있다.

‘우리 결혼했어요’는 이 리얼과 가상 사이에서 가상 설정을 더 중심에 세워놓은 버라이어티쇼다. 서로 어울리는(혹은 어울리지 않는) 짝의 설정이 이 프로그램의 중심을 이루며 그 위에 매번 주어지는 미션은 중간중간 설정을 변주시킨다. 리얼이라고 하면 그들의 반응이 리얼에 가깝다는 주장이지만 그것을 100% 신뢰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그들이 타 방송사의 프로그램에 나와 보이는 상반된 느낌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상대적으로 ‘1박2일’은 가상보다는 리얼을 강조했던 프로그램이었다. 이수근의 캐릭터가 거의 1년 정도가 지나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구축되는 것은 사실상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캐릭터를 부여하려 설정을 하지는 않았다는 걸 반증해준다. 이것은 또한 김C의 경우를 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대세가 리얼보다는 가상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일까. 최근 들어서는 ‘1박2일’ 역시 가상 설정의 유혹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부 접촉을 자제하고 내부 인원들의 게임적인 요소가 더 많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버라이어티쇼는 리얼과 가상 사이에서 점점 가상설정의 길을 선택하려 하고 있다. 리얼이 쇼에 다큐적인 요소를 가미했다면 가상은 쇼에 드라마적인 요소를 가미한다. 리얼이 현실 그 자체를 보여주려 한다면, 가상은 환타지를 부여하려 한다. 지역과의 접촉을 시도하던 ‘1박2일’이 대세였던 시점에서 급격히 지역 접촉을 차단하고 그들만의 게임에 몰두하게 된 ‘패밀리가 떴다’가 대세로 떠오른 것은 바로 이 리얼과 가상 사이, 현실과 환타지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영구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어차피 리얼과 가상은 리얼리티쇼를 구성하는 두 축의 바퀴일 뿐이다. 어느 한 쪽을 치중하다보면 다른 한 축이 그리워지기 마련. 어느 순간 가상설정의 남발은 거꾸로 진짜 리얼을 요구하게 될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