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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떼루아’, 햇와인일까 숙성와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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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루아’의 트렌디한 구조, 넘어서려면

‘떼루아’를 와인으로 친다면 갓 나온 햇와인일까, 아니면 좀더 숙성을 두고 봐야 하는 와인일까. ‘떼루아’의 여주인공 이우주(한혜진)는 맞선 자리에서 두 시간째 와인이 어쩌고 저쩌고 잘난 척을 하는 상대방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딴 와인얘기 하지말고 그 사람에 대해 얘기해요, 그게 예의니까.” 이 대사는 우리가 흔히 와인하면 떠올리는 그 우아한 척 폼잡아가며 마시는 술이라는 편견을 깬다. 전통주를 담그는 그녀에게 술이란 “간판보고 찾는” 것이 아니라, “맛이 좋으면 간판 없이도 몰리는” 그런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강태민(김주혁)은 전설적인 와인 샤토 무통 마이어 1945년 산을 찾아오라는 특명을 받고 프랑스로 날아간다. 강태민이 1억5천만 원을 주고 산 그 와인이 그만 이우주가 갖고 있던 복분자주와 바뀌어지고, 와인에 대해 문외한인 그녀는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며 홀짝 홀짝 이 와인을 마셔버린다. 강태민은 이 일로 심한 문책을 받고 결국은 회사를 떠나게 된다. 강태민에게 술은 맛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간판이기도 하다. 와인 한 병에 회사를 떠나게 되는 게 그의 처지다. 물론 그 간판은 강태민이 다니는 와인수입업체 사장 양승걸(송승환)에 의해 강요되는 것이다.

강태민의 삼촌, 정태(정호빈)는 그 양승걸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정태는 양승걸에게 “그 노력으로 좋은 와인을 만들 생각은 없냐”고 묻는다. 그러자 양승걸이 말한다. “아직도 그 꿈 못 버렸냐. 떼루아가 되어야 와인을 만들지.” 여기서 떼루아는 와인이 생장할 수 있는 환경적 조건을 말한다. 그러자 정태는 와인을 만드는 건 “사람의 노력”이라고 말한다. 정태는 결국 지병으로 죽게 되지만 이 생각은 강태민으로 전달된다. 따라서 양승걸과 강태민 사이에는 떼루아와 사람의 노력이라는 와인 철학에 대한 대결의식이 생겨난다.

‘떼루아’는 여러모로 이러한 와인을 두고 벌어지는 대결구도가 도식화되어 있다. 간판(이름, 마케팅)이냐 맛이냐, 떼루아냐 사람의 노력이냐 같은 이야기들은 이미 캐릭터로 구획되어 있고 그것은 또한 우리네 시골 같은 풍경과 파리의 이국적인 풍경의 대비처럼 명확하게 나뉘어진다. 이러한 도식적인 구조는 드라마의 시작으로서는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대부분의 전문직을 내세운 장르 드라마들은 먼저 그 직업적인 특성이 갖는 긴박감으로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고는 서서히 이야기를 도식화시키는 반면, ‘떼루아’는 물론 (프랑스의 풍경은 이국적이지만) 이미 인물들의 멜로 구도가 벌써부터 드러날 정도로 긴장이 흐트러져 있다.

만일 트렌디 드라마였다면 이러한 멜로 구도로부터의 시작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와인이라는 소재를 처음으로 다루는 드라마에서 와인에 얽힌 긴박한 사건을 초반부에 다루지 않는다는 것은 어딘지 기대감을 꺾는 느낌이다. 게다가 이미 그 흔한 실장님으로 등장한 강태민이 사실은 대기업 총수의 손자이고 그 할아버지가 태민이 사랑하는 지선(유선)을 떼놓는 그런 장면들은 이 와인 소재 드라마를 전형적인 트렌디 드라마로 착각하게 만든다.

물론 초반부지만 ‘떼루아’가 지금껏 보여주는 양상은 깊은 와인의 맛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은 전혀 숙성을 거치지 않은 햇와인의 어설픈 맛이다. 당장 입에 달고 상큼하다고 그것이 와인의 진짜 맛은 아닌 것처럼 드라마도 와인이라는 소재를 끄집어왔지만 당장 달콤한 대기업 손자와 보통의 명랑쾌활한 여주인공이라는 멜로 구도설정이 와인 소재 드라마의 진짜 맛일 수는 없다.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성장의 구조를 갖고 있기 마련이기에, 그것은 응당 햇와인이 아닌 숙성와인을 닮아 있어야 한다. 강태민과 이우주라는 캐릭터가 그저 달콤 쌉싸름한 멜로 관계에 머무르지 않고, 좀더 많은 시련을 거쳐 위대한 캐릭터로 변해가는 모습을 기대한다. 처음에는 모난 맛이지만 인고의 세월을 거쳐 차츰 부드러워져 실크 같은 감미로운 맛을 내는 숙성와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