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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박제된 그림 깨운 ‘바람의 화원’이 보여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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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다시 보는 ‘바람의 화원’

‘바람의 화원’은 지금껏 사극들이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우리네 옛 그림을 소재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극의 차별점은 단지 소재적 측면에서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그림을 중심으로 놓고 그 그림 속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드라마의 이야기 구조와, 그러한 대본을 예술적으로 영상화해낸 독특한 연출력에 있다.

이 사극이 그림에서 시작해서 그림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림으로 갈무리되는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극의 진짜 주인공은 어쩌면 이야기의 중심 뼈대를 세워준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그림이 바람처럼 귓가에 대고 속삭여주는 ‘바람의 화원’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보자.

‘기다림’- 한 예술가의 탄생
신윤복은 김홍도가 “그린다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런지요”하고 말한다. 이 대화는 이 사극의 화두이기도 하다. 신윤복을 그림 그리게 하는 것이 어떤 것에 대한 그리움이라면, 그것은 거꾸로 삶에서 그가 갖는 결핍을 말해주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알 듯이 예술가의 결핍은 예술 작품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과정.

드라마적 설정으로서의 남장여자라는 코드는 이러한 예술가의 결핍상황을 미적으로 상징해낸다. 즉 자신이 갖고 있으나 표출할 수 없(게 사회가 강요하)는 아름다움(美)을 정향(문채원)이라는 뮤즈로 해소하거나, 사회 비판적인 그림으로 풀어내는 상황을 남장여자란 코드를 활용해 쉽게 구상화해냈다는 말이다.

신윤복의 ‘기다림’이란 그림이 드라마 초반에 등장하고, 후반에 그 그림을 통해 신윤복이 사실은 여성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는 김홍도의 시퀀스가 등장하는 것은 따라서 여러 모로 의미가 있다. 그것은 김홍도가 신윤복을 한 인간이자 예술가로 이해해 가는 과정을 그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김홍도의 이해는 또한 이 사극을 함께 본 시청자들의 이해와 맥을 같이 한다.

‘군선도’- 서민 지향적 세계관
김홍도와 신윤복이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먼저 그 군상들을 본 후, 화포 앞에서 군선도를 그리는 장면은 이 사극이 지향하는 서민 지향적 가치관을 드러낸다.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그린다.”는 김홍도의 말은 저 서민들의 얼굴 속에서도 신선을 찾아낸다는 말로 해석된다.

사실 고미술에 대해 지금껏 대중들이 가졌던 인식을 생각한다면, 이 고급예술로 치부되는 소재가 드라마라는 대중적인 장르 속으로 들어온 것은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이다. 때아닌 신윤복 신드롬으로 한 고미술관에 이어진 대중들의 발길은 신윤복의 그림이 가진 서민성의 재발견인 동시에, 일정부분 그것을 대중적으로 전파한 이 사극의 기여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단오풍정’- 여성성의 시선
‘단오풍정’을 그리기 위해서 신윤복은 극중에서 단오날 금남의 지역인 계곡으로 들어간다. 그 곳에서 여장을 하고(물론 신윤복은 본래 여자 캐릭터이지만) 여성들의 세계를 둘러보는 신윤복과 김홍도를 그려낸 장면은 상징적이다. 즉 남성의(혹은 강요된 남성의) 시선으로 여성의 세계를 살피고 그 속에서 여성들이 단 하루지만 느꼈을 자유에의 희구를 그림 속에 담는다는 장면은 이 사극이 주목하는 여성성의 시선을 드러낸다.

‘주사거배’ - 억압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
김홍도와 신윤복이 정조(배수빈)에게 동제각화(같은 화제를 갖고 각각 그림을 그리는 것)를 명 받아 그리게 되는 선술집 풍경에는 대화원들이 각각 가진 그림에 대한 철학이 담겨져 있다. 그것은 주막 앞에서 배경을 두고 벌이는 그림 논쟁을 통해 드러난다. 김홍도는 배경보다는 인물 그 자체만으로도 그 성정이 다 드러난다고 주장하고, 신윤복은 그 사람만 봐서는 그 사람이 뭐를 원하는 지 알 수 없으며 오히려 그 배경이 그 마음을 알게 해준다고 한다.

신윤복은 주막 평상 위에 물로 찍어 새 그림을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 새는 이렇게 있으면 그저 새일 뿐입니다. 허나 이렇게 새장을 그려놓으면 그저 새이기만 했던 이 새가 무엇을 원하는 지 그 마음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대목은 신윤복이 그리고픈 자유로운 그림(새)과 그것을 허하지 않는 상황(새장)을 상징화해낸다. 신윤복이 그린 ‘주사거배’로 정조가 조정대신들의 숙청을 단행하는 시퀀스는 바로 이런 억압된 상황에 대한 비판의식을 에둘러 보여주는 대목이다.

‘월하정인’, ‘월야밀회’, ‘유곽쟁웅’ - 욕망과 인간애의 대립
조정대신들에 의해 도화서에서 쫓겨나 김조년(류승룡)의 사화서에서 일하면서 신윤복이 그리게 되는 일련의 그림들, 즉 ‘월하정인’, ‘월야밀회’, ‘유곽쟁웅’은 남녀 간의 사랑을 담고 있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 그림의 이야기를 조금은 다른 식으로 풀어낸다. 그것은 신윤복과 정향, 그리고 김조년 사이의 밀고 당기는 상황으로 그려내는 것. 김조년은 돈과 권력으로 정향을 붙잡아두고 있으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있고, 신윤복은 정향의 마음을 얻고는 있으나 자신이 여성이라는 한계 때문에 그저 그림을 통해 사랑을 표현할 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사랑의 차원이 극명히 대비되는 지점이다. 김조년의 사랑은 욕망이지만 신윤복의 사랑은 동성이라는 한계 속에서 인간애에 가깝게 그려진다. ‘월야밀회’를 가지고 김조년과 벌이는 해석에서 드러나는 남성성의 시각과 여성성의 시각의 부딪침은 욕망과 인간애의 대립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서직수 초상’ 같은 초상화들 - 기록으로서의 그림
사극의 중반 이후부터 시작된 정조의 사도세자 초상을 두고 벌어지는 숨가쁜 추리극은 그 바탕에 ‘기록으로서의 그림’이라는 그림의 다른 한 편의 얼굴을 그려낸다. 정조가 김홍도와 신윤복을 불러 “너희들은 내 눈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림이 예술적 차원 이외에 사진 같은 기록적인 차원으로 기능함을 말해준다.

이 사극이 그림을 사진의 기록적 기능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단초들은 여러 차례, 몽타쥬 기법으로 초상을 완성해내는 에피소드를 통해 드러난다. 이것은 풍속화로서 예술적이면서도 기록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신윤복의 그림 이야기가 어떻게 팩션이라는 역사추리에서 주목받게 되었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미인도’ - 저널리스트의 면모를 가진 예술가
이 사극이 ‘미인도’에서부터 시작해 ‘미인도’로 끝나는 것은 그만큼 이 그림이 갖는 다층적인 의미에 주목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 첫 번째는 “‘미인도’는 신윤복의 자화상이었다”는 도발적인 팩션의 상상력이다. 바로 이 상상은 신윤복을 남장여자로 재탄생시켜 그의 그림과 삶을 재조명해줄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둘째는 이 ‘미인도’에 내포된 신윤복의 미의식의 세계이다. 섬세한 여성적 필치로 그려진 여인의 모습은 그 자체로 신윤복이 가진 여성적 미의식의 세계를 드러낸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목되어야 할 것은 바로 그 ‘미인도’의 주인공이 여성이며, 그것도 기생이라는 사실이다. 정향이라는 기생으로 대변되던 거세된 미의식을 통해 단 한 번 자신을 그녀의 모습으로 화해 그림에 담아 넣은 그 정신 속에는 신윤복이 가진 시대에 대한 저널리스트적인 면모가 숨겨져 있다. 그것은 양반들의 초상이나 임금의 어진과 함께 나란히 기생의 그림을 거의 실물 크기로 그려 넣는 마음 속에 드리워진 비판의식을 말한다. 따라서 ‘미인도’는 신윤복의 예술적 성취와 저널리스트적인 면모를 드러냄과 동시에 이 드라마가 취하려한 팩션의 상상력까지 아우르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바람의 화원’은 교과서나 화첩 속에 박제되어 있던 그림들을 끄집어내 생생한 영상과 상상력을 동원한 스토리를 통해 다시 살아나게 했다. 수백 년을 건너온 그림이라는 매체를 따라서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이 경험은 고미술관에서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예술적 경험이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물론 사실과 허구 사이에 놓인 거리가 있지만 이것은 이 사극을 통해 환기된 옛 그림에 대한 지대한 관심만으로도 충분히 상쇄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드라마의 몫이다. 깨워낸 그림들을 통해 진짜 사실을 찾아가고, 또 지속적으로 옛 그림에 대한 관심을 이어가는 것은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