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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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욕하면서 안본다구? 볼 건 다 본다

D.H.Jung 2008. 12. 24.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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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하면서 보는 프로그램이 대세인가. 최근 일일드라마 ‘너는 내 운명’의 발호세(?)라는 인물이 화제다. 드라마상 이름은 본래 강호세인데, 흔히들 말하는 발연기(발로 하는 연기 같다는 뜻으로 연기력 부재를 비하하는 말)의 ‘발’자를 붙여 발호세라 불리고 있다. 발호세의 연기력은 지탄의 대상에서 이제는 격상되어 “연기의 신기원을 열었다”는 식으로까지 오히려 인기(?)를 얻고 있다. 손바닥에 맞지도 않았는데 어색하게 쓰러지는 장면은 드라마 속에서는 그저 지나가는 장면이었을지 몰라도 인터넷 세상으로 오면 하루에도 수만 번씩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발연기의 끝장을 보여준다.

발호세의 백미는 이른바 ‘붕가시리즈’에서 압권을 이룬다. 대사가 되지 않아 “저희 분가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묘한 뉘앙스로 들리자, 네티즌들은 이 장면을 떼어 붙인 후, 밑에 자막으로 “저희 붕가하겠습니다”라는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댓글들은 내용은 없고 대부분 “ㅋㅋ” 같은 웃음소리만 가득 차 있다. 이 정도면 어설픈 연기를 보면서 화가 났던 시청자들도 그저 박장대소할 수밖에 없다. 이른바 정극의 연기가 너무나 어설퍼 그 자체가 개그처럼 희화화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분명 욕이지만, “그래서 안 본다”는 식의 욕이 아니다. 오히려 “그래서 기대된다”는 의미까지 들어가 있다. “그래 막장드라마야 끝까지 한번 해봐라”는 식의 적극적인 체념적 대응이다.

만일 ‘너는 내 운명’이 꽤 괜찮은 주제와 스토리, 그리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를 세워둔 드라마였다면 어땠을까. 몇몇 발연기는 그저 웃어 넘겨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설정으로 가고 있는데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은 40%에 육박한다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욕하면서 다 본다는 얘기다. 한편에서는 드라마 속 비현실적 캐릭터를 욕하면서 보고, 또 한편에서는 이 비현실적인 드라마를 욕하면서 본다는 말이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의 역사는 너무나 깊어서 어디서부터 그것이 비롯되었는지 찾기가 어렵다. 어쩌면 저 신파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갈등이고, 그 갈등에는 대립하는 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한쪽에서 문제를 만들면 다른 쪽은 거기에 대한 대응을 하면서 드라마가 만들어진다. 이것은 드라마의 기본 얼개다. 그러니 어찌 보면 심정적으로 자기 편인 주인공을 핍박하거나 대립하는 대상을 욕하면서 드라마를 보는 건 정상적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나 캐릭터가 등장할 때다. 대부분 드라마를 보면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핍박하는데 요즘 같은 상황에 그런 시어머니가 있을 리 만무며 그렇게 한다고 당하는 며느리도 있을 턱이 없다. 그런데 그 비정상적인 상황이 드라마로 나왔을 때, 그 상식을 뛰어넘는 캐릭터는 오히려 힘을 발휘한다. 비현실적일수록 보는 시청자들의 어처구니없음은 더 커지고, 거기에 대한 분노, 혹은 적개심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 상태를 느꼈다면 이건 그 드라마에 낚였다는 얘기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중독이라는 것이다. 중독은 자신에게도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니고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바로 그것 때문에 빠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비정상적이라 빠지는 것이다. TV의 주 시청층의 연령대가 높아지면서 그러나 이 중독적이고 퇴행적인 드라마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그 시청층에 환영을 받는다. 욕? 그것은 인터넷에서나 회자되는 것들이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라는 말에는 두 주체가 나뉘어져 있다. ‘욕하면서’는 그 드라마를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지만 그저 볼 수밖에 없어 보게된 시청층들이 인터넷에서 주로 하는 행위이며, ‘보는’은 이런 상황과 전혀 상관없이 그것의 문제를 인식하지 않고 보는 고정 시청층의 행위를 말한다. 이 두 주체는 나뉘어져 있고, 이 드라마를 보는 두 시선 또한 점점 갈라져가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TV가 점점 올드 미디어화되어 가고 있거나, 뉴미디어의 세대들의 감성을 끌어안지 못하고 있다는 징후로도 볼 수 있다.
(이 글은 스포츠칸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