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의 전쟁신이 MBC사극에 위치하는 곳
사극에서 전쟁이라는 스펙터클이 가지는 힘은 자못 크다. 다른 내용을 차치하고라도 그 장면 자체가 대단한 볼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KBS 대하사극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김명민)이 치르는 일련의 해전들은 마치 스포츠 중계처럼 방영됐다. 예고편에서도 마치 한일전이라도 치르듯 '이번엔 어디서 벌어진 무슨 해전이다'하고 자막이 붙었고, 실제로 사극을 시청하는 입장에서도 그 관점으로 스펙터클한 전쟁의 흥미진진함을 만끽했다.
'태조 왕건', '대조영' 같은 일련의 KBS 대하사극이 주말의 권좌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능수능란한 전쟁과 전투신의 연출이었다. MBC와 SBS에서 아무리 따라하려 해도 그 노하우를 단번에 체득하기는 어려웠기에 사극 하면 KBS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이것은 고구려 사극에 와서 정점을 이뤘다. 물론 '주몽'이 특유의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늘 아킬레스건처럼 따라오는 건 '소소한 전쟁 신'이 가진 왜소함이었다. SBS는 '연개소문'의 단 2회 동안의 전쟁 신을 찍기 위해 몇 개월 동안 어마어마한 물량을 쏟아 붓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KBS는 '대조영'의 안시성 전투를 통해 역시 지존의 면모를 과시했다.
전쟁사극이 요령부득인 MBC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갔다. '허준', '상도' 같은 전쟁이 아니라도 인물들 간의 미션들이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구축하는 그런 사극들이 MBC사극에 자리했다. MBC 사극에 어떤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태왕사신기'부터였다. 엄청난 제작비도 제작비지만 완성도에 공을 들인 결과, '태왕사신기'는 CG와 전쟁 장면의 연출에 있어서 한 단계 높은 성과를 보여줬다. 그리고 '선덕여왕'에 와서 이제 MBC사극은 아킬레스건으로 지목되던 전쟁사극의 한계를 한 발 넘어서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선덕여왕'의 신라와 백제 간에 벌어진 전쟁 에피소드가 남달랐던 것은 스펙터클에 충실하면서도 디테일을 잊지 않는 연출 덕분이었다. 김서현(정성모)이 이끄는 신라군이 아막성을 얻기 위해 벌이는 공성전에서는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상황에 성벽을 뛰어오르고, 사다리를 타고 오르다 떨어지는 등의 스펙터클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덕만(이요원)과 동료들이 처음 전쟁을 접하며 느끼는 두려움과 이를 차츰 적응해가는 과정을 놓치지 않는다.
고립되어 백제군에게 포위된 덕만과 화랑들이 원진을 짜고 대항해가는 장면 역시 인물의 감정을 살림으로써 왜소해 보이는 전투를 극적 긴장감으로 이끌었다. 여기에 설원랑(전노민)이 백제군을 속이기 위해 벌이는 고육지책은 전쟁 스펙타클의 또 한 요소인 전술적인 묘미를 안겨주었다. 백제군을 물리치고, 동시에 정적이랄 수 있는 김서현과 김유신(엄태웅)을 사지로 몰아넣는 일거양득을 취하는 모습은 전쟁과 정치가 맞물리는 재미를 선사한다.
사실 '선덕여왕'의 이러한 전쟁 장면들의 완성도를 말하는 것은 그 비교대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만일 저 '적벽대전' 같은 작품과 비교한다면 '선덕여왕'의 그것은 보잘 것 없는 전투에도 못 미치는 장면으로 치부될 수 있다. 또 일련의 명장면이라 일컬어지는(예를 들면 '불멸의 이순신'의 해전들이나 '대조영'의 안시성 전투 같은) 장면들과 비교해도 여전히 소소한 느낌을 벗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스펙터클의 완성도는 노하우도 노하우지만 기본적으로 제작여건과 함수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선덕여왕'이 보여준 전쟁 신의 가치를 생각해봐야할 것이다.
최근 들어 사극에서의 전쟁 스펙터클은 디테일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과거처럼 어느 나라와 어느 나라가 싸우고 누가 전쟁을 이끌었고 어떻게 이겼는가 하는 그 교과서적인 내용의 전달보다는, 전쟁 속에서의 인물들의 실감나는 심리나 그 관계들이 엮어가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거대한 전쟁과 관계를 맺는가 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이것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시청자들을 방관자로 세워놓던 스펙터클에서, 이제는 그 속에서 같이 뛰는 스펙터클을 대중들이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그런 면에서 덕만과 그 일행을 앞세운 '선덕여왕'의 전쟁 신은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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