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못하는 것과 안하는 것 사이에서
나이 마흔에 접어든 독신남녀. 의사와 건축가라는 전문직의 그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며 툭탁거리면서 정이 들어가는 두 사람. 무엇보다 시종일관 배꼽 빠지게 웃게 만드는 엉뚱한 캐릭터들의 좌충우돌. 그리고 이들 앞에 놓여진 지상과제 결혼. '결혼 못하는 남자(이하 결못남'가 갖고 있는 이러한 구도와 소재와 설정은 우리로 하여금 한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바로 '트렌디 멜로드라마'다.
실제로 이 드라마의 연출은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를 따르고 있고, 구도 또한 현재 트렌드라 할 수 있는 40대의 화려한 독신을 다루고 있으니 이러한 호칭이 그다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결못남'을 그저 트렌디 멜로드라마라고 지칭했을 때, 그 호칭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해 이 드라마가 가진 의미 있는 시선 하나를 놓치지 않을까 그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결못남'은 트렌디 멜로가 담아내지 못했던 현대인들의 특징적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결혼 못하는 남자', 조재희(지진희)는 이 드라마가 그를 '못하는' 남자로 지칭하지만, 스스로는 '안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가 살아가는 모습을 들여다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는 혼자 앉아 있는 것조차 민망할 고깃집에서 태연히 고기 맛을 음미하는 남자고, 불꽃놀이로 다들 인파에 시달릴 때 자기만 아는 장소에서 혼자 그 시간을 즐길 줄 아는 남자다. 즉 사회적인 통념 속에서 나이 마흔인 그는 '못하는' 남자지만, 자기 스스로는 분명 혼자임을 즐기는 '안하는' 남자라는 것이다.
실제로 드라마 속 조재희가 혼자 완벽한 시간을 즐기는 모습은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또 한 측면의 판타지를 자극한다. 그것은 '관계 스트레스'로부터의 탈출이다. 조재희가 말하는 것처럼 결혼이란 자유로운 혼자만의 생활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홀로 살아가는 모습은 물론 외로움을 동반하기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부러움을 갖게도 만든다. 그는 조직의 스트레스가 없는 인물이다. 그 스트레스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이자 친구인 윤기란(양정아)의 몫이다.
또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신만의 공간을 완벽하게 구축하고 있다. 이 성역이 되어버린 집은 물론 사십의 남자가 궁상을 떠는 모습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는 그 혼자 지내는 시간을 만끽한다. 그는 자기에게만 충실할 수 있는 완벽한 시간을 그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갖고 있는 인물이다. 이것은 그 나이대의 결혼한 남자들(혹은 여자들)이 갖는 시간과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이렇게 혼자임을 즐기는 조재희가 부러운 상황은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만큼 현대인들이 관계에 지쳐 있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조재희라는 캐릭터가 가진 이러한 면모는 현대인들의 단면을 풍자적으로 그려낸다. 따라서 이 "독신이 즐겁다"는 엉뚱한 캐릭터는 독특한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즉 웃기는 대상이 되면서도 부러운 대상이 되는 것이다. 혼자 살아가는 것이 괴물처럼 여겨지는 결혼 권하는 사회는 어쩌면 그 자체로 이 사회의 관계에 대한 집착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혼자 자유를 구가하자니 괴물 취급을 받고, 그렇다고 결혼을 하자니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 이것은 딱히 결혼이 아니더라도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이 아닐까.
조재희의 모습은 거꾸로 혼자이면서 그 혼자임을 즐기지 못하는 장문정(엄정화)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그녀는 퇴근시간에 함께 저녁먹을 사람을 고민하는 입장이고, 주말이면 갑작스런 직장의 호출에도 흔쾌히 시간을 내줄 만큼 혼자인 주말이 걱정스런 입장이다. 그런 그녀에게 저 혼자임을 즐기는 이 남자는 괴물이면서도 부러운 대상일 수 있다. 그녀의 입장은 사실 사회적인 통념에 가까운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조재희와 장문정이 그려내는 '결못남'의 멜로는 그저 결혼적령기를 넘은 남녀의 멜로물과는 다른 구석이 있다. 거기에는 우리가 흔히 드라마 속에서 발견하는 신데렐라에 대한 판타지도 없고 성공에 대한 판타지도 없다. 오히려 이 드라마가 가진 판타지는 결혼을 했을 때의 판타지와 결혼을 하지 않았을 때의 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 즉 조재희와 장문정의 부딪침은 이 두 판타지의 부딪침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가 트렌디 멜로 그 이상을 담는 것은 이 양측의 판타지가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양면성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관계로부터의 탈주 혹은 관계 속으로 편입. 이것은 현대인의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옛글들 > 드라마 곱씹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찬란한 유산'이 깬 대박 공식 세 가지 (2) | 2009.07.13 |
---|---|
'선덕여왕'이 남장여자를 활용하는 법 (0) | 2009.07.08 |
'시티홀', 차승원의 재발견, 김선아의 건재함 (4) | 2009.07.03 |
'선덕여왕'의 여성적 카리스마, 미실 vs 덕만 (0) | 2009.07.01 |
악녀의 새로운 진화, 미소가 살벌한 그녀들 (0) | 2009.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