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는 아직도 우리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는 도대체 얼마나 힘든 길을 홀로 걸어왔던 걸까. 우리나라 최초의 메이저 리거. 코리안 특급. 아예 이름보다는 코리안이라고 불렸던 사나이, 박찬호. IMF로 고개를 떨군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또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그 강속구를 던지던 손이 이제 딸 애린이의 앙증맞은 발을 씻긴다. 그러면서 그는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최고의 시간들과 최악의 시간들을 거쳐,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지점에서 다시 도전을 하고, 그것으로 다시 마운드에 설 수 있게 용기를 준 이는 다름 아닌 바로 그들, 잘 웃는 아내와 아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96년 IMF 시절, 박찬호는 메이저 리그의 거구들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5년간 845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계약. 박찬호에게는 최고의 시절들이었다. 하지만 부상과 부진의 연속으로 트레이드를 거쳐 결국 마이너리그까지 내려간 그는 은퇴를 생각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올라가는 것만 배웠지 내려오는 걸 배우지 못한 박찬호에게 그것은 지옥 같은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차인표가 술회하는 것처럼 박찬호는 그 시간 속에서도 은퇴를 생각하기 보다는 재기를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메이저 리그 마운드에 섰다. 과거의 영광은 아니지만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박찬호. 'MBC스페셜-박찬호 편'이 보여준 것은 젊은 시절 박찬호라는 이름이 아니라 코리안이 되었던 박찬호가, 이제 자신의 이름으로 돌아와서도 여전히 그 코리안으로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한 달에 한 통 정도씩 날아오는 고국에서의 팬레터에 기분이 좋아지고, 집으로 찾아오는 지인들에게는 한국음식을 대접하며 한국에 대해 알려주는 그는 바로 그 한국이 던진 질타와 비난으로 죽고 싶은 지경에 이르기도 했었다. 잘 할 때는 잘 해주던 그 한국이 잘 안될 때는 마치 사라져줬으면 하는 것에 그는 화가 날 법도 했다. 그런 그였지만 그는 늘 한국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그래도 여전히 남아있는 한결같은 팬들에게 상처를 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그의 라커룸 서랍 안에 놓여진 작은 태극기처럼, 그는 드러내진 못해도 늘 마음 속에 한국을 담고 있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본선도 아닌 예선에 오키나와까지 날아왔다. 사실 뛸 필요도 없는 그런 경기였다. 그는 주장으로서 후배들을 이끌어주는 마지막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지난 1월, 185센티, 95킬로그램의 거구인 그는 눈물을 흘렸다. 국가대표 은퇴. 그것은 아쉬움과 회한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2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짊어지게 된 한국이란 이름의 거대한 멍에가 그를 영광스럽게도 했고, 힘겹게도 했을 테니까.
박찬호의 성공과 추락과 재기는 마치 우리나라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 같다. 거의 비슷한 곡선을 그려온 박찬호와 우리나라는 그래서 서로를 응원하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IMF 시절, 처음 박찬호가 당당히 메이저 리그의 마운드에 섰을 때 우리는 그를 응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박찬호가 우리에게 던지는 응원가이기도 했다. 그가 추락의 길을 걸을 때, 우리는 박찬호를 더 이상 응원하지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우리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MBC스페셜', '박찬호는 당신을 잊지 않았다'편이 보여준 것은 이 어려운 시기에 또 우리를 응원해주는 박찬호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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