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보았던 하늘'


어느새 선선하다.
올 여름은 내내 하늘이 쾅쾅대고 비를 쏟아내고 바람을 몰아오는 통에
마치 전쟁통 같았다.

그런데 오늘 바라본 하늘은
정말 높고 파랗다.
그 파란 하늘 위에 떠있는 구름은
'천공의 성 라퓨타'를 보는 듯 심지어 신비롭다.

쨍쨍 햇볕이 쏟아져도
바람이 좋은 계절이다.
이런 날에는 나무 그늘에 누워
파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쳐다보고 있어도 좋을 것이다.

참 좋은 시간들은
빨리도 지나간다.

가을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가끔 다락방에서 꺼내온 아코디언을 연주하셨다. 아코디언하면 어딘지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집시의 시간'에 나오는 음악 같은 걸 떠올리겠지만, 아버지가 연주하는 곡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것은 트로트, 이른바 뽕짝이었다. 쿵짝 쿵짜작 하며 이어지는 아코디언의 반주는 기막히게 뽕짝에 잘 어울렸다. 아버지는 그 연주에 맞춰 '목포의 눈물'이나 '동백아가씨' 같은 곡을 잘도 부르셨다. 아버지가 연주할 때 어머니는 다소곳이 앉아 그 노래를 감상하시곤 했다. 마치 팬이라도 되는 듯이. 그래서일까. 어린 시절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나는 왠지 '동백아가씨'를 떠올리곤 한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일로 지새우시던 어머니는 어쩌면 아버지의 노래 한 자락에 피로를 푸셨을 지도.

아버지에게 이어받은 끼 때문인지, 아니면 어린 시절부터 들어왔던 아버지의 아코디언 연주 때문인지, 나도 중학교 시절부터 통기타를 끼고 살았다. 누나가 가끔 집에서 하는 음악 동아리 모임을 귀동냥으로 들어가며 노래를 배웠고, 그 음악동아리에서 일일찻집을 할 때는 누나와 무대에도 올랐다. 목청이 꽤 좋았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내 노래에 박수를 쳐주고 앵콜을 불러 주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노래를 부르고, 그 노래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 공감의 기억은 평생의 자산이 되었다. 그래서 호주에 1년 정도 유학을 갔을 때 외로웠던 나는 무작정 통기타를 하나 구입해 노래를 불렀다. 외국친구들이 생겼고, 우리는 다 같이 존 레논의 '이매진'을 부르며 하나가 되었다.

요즘 쏟아져 나오는 오디션 프로그램들을 볼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떠올리고, 또 통기타를 들고 다니던 젊은 시절을 떠올린다. 음악이란 본래 그렇게 누군가 부르고 누군가 그걸 듣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경험이다. 1등이 되기 위해 지나치게 경쟁적인 모습을 볼 때면 '저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버지는 시골에 찾아온 '전국노래자랑'에 출전했지만 예선 탈락했다. 그래도 자랑처럼 얘기하시는 걸 보면 그 경험이 못내 즐거우셨던 모양이다. 음악이 진짜 감동을 주는 건 잘 불러서가 아니라, 그 속에 마음이 담겨서이고 그것이 상대방에게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호주에 있을 때 그 먼 곳을 찾아오신 어머니와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정말 인가가 하나도 없는 허허벌판을 차를 몰고 달려가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카세트테이프의 노래를 따라하시다가 나중에는 카스테레오를 꺼버리고 무반주로 트로트를 부르셨다. 그런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깔깔 웃으며 운전을 하고 있는데 '동백아가씨'를 부르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조용해지셨다. 어머니는 울고 계셨다. 아마도 그 노래가 주는 정조가 한 평생 일만 하며 살아온 자신을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자신이 아들과 함께 이 이역만리에서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게 기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홍수처럼 쏟아지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챙겨보며 하루에서 수십 곡의 노래를 듣지만, 그 때 어머니가 불렀던 '동백아가씨'만한 감흥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음악이란 그런 것이다.


정말 영화처럼 사는 형이 있다. 물론 이 영화는 로맨틱한 장르가 아니다. 예술가의 삶을 다루는 조금은 지질하게도 보이는 홍상수표 영화 같은 장르다. 회사를 다녔고 마흔 즈음에 때려 쳤다. 그리고 한 지방 도시로 내려가 자그마한 방 한 칸 딸린 집을 얻었다. 한 때 음악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던(쫄딱 망했지만) 이 형은 방안 한쪽 벽 책장에 레코드판을 빼곡히 채워 넣었다. 찾아갈 때마다 마치 음악카페처럼 형은 velvet underground나 한대수 판을 틀어주곤 했다. 비가 올 때 좁은 방안에서 형이랑 소주 한 잔을 마시면서 음악을 듣는 맛은 정말 좋았다. 그것은 마치, 영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12시쯤 해서 게으르게 일어나 대충 밥을 챙겨먹고 하루 종일 동네와 일상을 기웃거리면서 감성을 열어놓고 지내다 그 날의 일들을 엮어 자신이 운영하는 사이트에 글을 올리고 밤늦게까지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다 잠이 들고...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가나 영화감독, 혹은 안돼도 수필가 정도는 될 거라고 여겼지만 형은 10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미혼이고 여전히 늦잠꾸러기이며 술 애호가에 글 애호가다. 영화 같은, 소설 같은 삶이다. 나로서는 도무지 따라할 수 없는.

가끔 '우리 결혼했어요'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서 문득 문득 그 형을 떠올린다. 또 내 결혼생활도 생각한다. 정말 가상은 현실과는 너무나 다르다고. 그 물기 하나 없을 것처럼 뽀송뽀송한 결혼생활이 어디 있을 것인가. 또 정반대로 결혼 같은 사회적 틀 바깥에서 살아가는 완전한 자유로운 삶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 가상 속에서 밥 먹고 잠 자고 일 하고 여행 떠나는 일상은 우리가 현실에서 하는 것과 너무나 같아 보이지만 왜 또 그렇게 달라 보이는 걸까. 똑같은 일상이라도 현실과 가상 사이에 벌어져 있는 이 틈새는 우리의 판타지를 자극한다. 어차피 내가 겪을 일 아닌데 어떤가. 남의 떡은 정말 좋아 보이고 커 보인다. 가상이 현실보다 좋아 보이는 건 바로 내가 실제 겪는 경험과 타인의 경험 사이에 놓여진 거리감 때문이다.

언젠가 그 형이 이런 얘길 한 적이 있다. "난 터미널에 붙어 있는 영화관은 가지 않는다." 이유인즉슨 영화를 보고 극장문을 나서면 느껴지는 그 낯섦 때문에 어딘가를 떠나고픈 욕망이 샘솟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실제로 무작정 터미널에서 아무 버스나 타고 떠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런 얘길 하면 또 혹자는 "정말 낭만적이다"하고 말한다. 하지만 실상을 아는 나로서는 그것이 그다지 그렇게 낭만적인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외로운 것이다. 정말 현실에 발을 되돌리기가 싫은 것이다. 그 영화 속 낯선 세계를 계속 이어보고 싶은 것이다. 형은 정말 외로웠던 것이다.

아주 예전 곤지암에 사는 화가 선생님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작업실로 쓰시는 집이었는데 넓은 마당과 집 구석구석 
선생님의 손때가 묻은 작품들이 투박하게 놓여져 있었죠.
TV가 없어서 우리는 서로 얼굴보고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술도 많이 마셨죠.
선생님이 집 뒤켠에서 따온 호박을 듬성듬성 자르고
햄 하나를 통째로 꺼내서 역시 대충 썰어 넣고는
볶아서 안주로 내놓으셨습니다.
글쎄요... 맛으로 치면 식당처럼 맛깔나진 않았지만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여긴 농약도 없어. 그냥 먹어도 되지."
그 말 한 마디에 왠지 더 맛이 나더군요.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노래도 듣고
그러다 녹차도 마셨습니다.
차와 술은 함께 하면 안된다고들 했지만
그 때는 녹차를 안주삼아 술을 마시기도 했죠.

그렇게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곤지암 소머리 국밥집에서 해장을 하고는
다시 서울로 돌아오곤 했죠.
사실 뭐 특별한 게 있었던 것도 아닌데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저는 늘 그 집을 떠올립니다.
선생님...

아마 시간이 지나고 내 기억이 만들어낸 환상일 것입니다.
그 집은 아주 아름다운 집으로 내 머릿속에 그려져 있습니다.
언제든 가고 싶은 곳. 힘들 때 문득문득 떠오르는 곳.
뭔가 늘 얻어갔던 곳. 마음 하나 편하게 놓고 사색에 잠길 수도 있었던 곳.

블로그를 하면서, 나는 늘 이 곳이 내 집이다, 이렇게 생각하곤 했습니다.
촌스럽게도 '홈페이지' 세대였던 나는 그 홈페이지도 집으로 생각했죠.
그래서 가끔씩 누군가 허락도 받지 않고 저벅저벅 들어와 침을 뱉거나
심지어 용변(?)을 보고 가면 정말 화가 났습니다.
이 곳, 사적인 공간이 아니었던가요?
요즘은 꼭 그런 것 같지 않더군요.
이제 블로그가 마치 공적인 공간이나 되는 것처럼
당연스럽게 마구 글을 달기도 하니까요.

어떤 한 블로거가 자기 집에서 장사를 한 모양입니다.
뭐 처음부터 그랬을까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겠죠.
세상의 많은 것들이 처음부터 상업화되진 않았을 겁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 자본이 찾아오고,
그 때부터 그 사람 많은 곳은 사람살기 어려운 곳이 되버리는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인 듯 합니다.

덕지 덕지 상품들의 흔적이 묻어난 곳은
그만큼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지금 그 때 그 아름다운 집이 떠오릅니다.
선생님도 떠오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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