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산성 밑 국수집에서 국수 한 사발 먹고 서성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계절이다.
달칵이는 경쾌한 얼음소리를 들으며 그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데
아내의 메시지가 왔다.
점심을 먹고 있단다.
모두가 나간 빈 사무실에 앉아 싸가지고 간 도시락을 까먹는단다.

때론 한없이 모든 것들이 감사하게 여겨지는 그런 순간이 있다.
이럴 때는 그간 수없이 원고 수정을 요구했던 편집자나
말 지겹게 듣지 않는 회사 후배나
어딘지 일상에 지쳐 대화가 멀어진 배우자에게나
전화를 걸 일이다.

한껏 여유로워진 그 마음 속으로는
뭐든 들어오지 않을 것이 없다.

며칠 전 부모님을 베트남 가는 비행기에 태워 보냈다.
한 달 간의 여행이었다.
마음에 부모님에 대한 부채감이 있었다.
한 번 심하게 다퉜던 것이다.
고부 간의 갈등 사이에서 바보스럽게도
아내 편을 노골적으로 들었더니
어머니는 깊은 상처를 받았던 모양이었다.

며칠을 울고 잠을 못잔다고 아버님이 알려주셨다.
바로 내려가 잘못했다고 말했지만
이미 내 마음은 다 들킨 후였다.

서먹하게 부모님을 베트남 가는 비행기에 태우고
돌아오면서 나중에 내 자식이 나처럼 굴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햇살 좋은 초여름. 행주산성 밑 국수집 근처 야외 커피숍 그늘에서
아내의 메시지를 읽었다.

'어머님이 반찬을 주셔서 내가 이렇게 호젓한 도시락타임을 갖는다'

문득 베트남 가는 날에도 챙겨먹으라고
어머님이 차에 챙겨두신 반찬이 떠올랐다.

때론 한없이 모든 게 감사해지는 그런 순간이 있다.


"저 식스팩 좀 봐. 남자라면 모름지기 저렇게 관리되어 있어야 남자지." 이른바 짐승남이라 불리는 아이돌이 보기 좋게 셔츠를 쫙쫙 찢을 때마다 내 마음도 쫙쫙 찢어졌다. 그 때마다 불쑥 튀어나온 내 원팩은 한없이 초라해졌다.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나도 관리하면 저렇게 할 수 있어." 괜한 호기에 등 떠밀려 덜컥 동네 헬스클럽을 끊어버렸다. 그래 꽃중년이 대세라는데 꽃중년은 못돼도 배불뚝이는 면해야지, 하며 찾은 헬스클럽. 하지만 하루 동안 트레이너의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고 나자 생각이 달라진다. 이게 운동이야? 노동이지. 이러다 늙는다 늙어. 괜스레 반복적인 헬스보다는 특별강좌식으로 한편에서 매일 벌어지는 요가나 필라테스, 에어로빅 같은 게 눈에 들어온다. 저거라면 할 수 있겠는데... 마음은 굴뚝이지만 좀체 그 선을 넘어 들어가지 못한다. 온통 여자들뿐이기 때문이다. 왜 트레이너는 남잔데, 이런 강좌에 남자는 한 명도 없는 걸까. '남자들은 좀 즐겁게 운동하면 안돼?' 하는 괜한 트집이 생긴다.

사실 남자들이 몸을 가꾸기 위해(물론 건강도 챙기는 것이지만) 운동을 한다는 것은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심지어 남자의 불쑥 나온 배는 '인격'이자 '여유'의 상징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언젠가부터 짐승남들이 등장했고, 쩍쩍 찢어놓은 셔츠 사이로 식스팩을 드러내면서 이 '인격'은 흉물이 되어버렸다. 과거 남자를 보던 기준은 능력이었고, 그래서 이 여유로운 뱃살이 그 능력의 한 기준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매력이 기준이 되는 시대. 그러니 잘 가꾸어진 보기 좋은 몸은 남성의 또 다른 가치가 된 것. 하지만 TV 화면을 통해 짐승남들의 식스팩이 만들어내는 여성들의 높아진 시선과, 실제 현실은 많이 다른 것 같다. 이미 여성들은 그 미적인 삶을 추구하고 영위하고 있지만, 과거의 잔상이 남아있는 나 같은 중년남성들은 헬스클럽 한 구석에서 짐승 같이 고통을 호소하며 뱃살이나마 빼려 안간힘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일찍 포기한 현명한 친구들은 저마다의 원팩을 두드리며 내게 말한다. "짐승남 되려고 짐승처럼 살아야겠냐? 먹어. 먹어."

힘들어도 어쩔 수 없이 헬스클럽을 나가지만 이 놈의 몸은 좀체 변할 생각이 없다. TV 속 짐승남들 앞에 한없이 초라해지며, 아무리 노력해도 제자리라 느껴질 때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가면 여전히 진선미로 순위가 매겨지지만, 이제 그 순위는 역전되었다고. 진의 시대에서 선의 시대를 거쳐 이제 미에 도달한 지금, 미는 하나의 권력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이 미의 여신 아래 연실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래도 헬스클럽 문턱에서 나는 여전히 햄릿처럼 갈등한다. 짐승남이 될 것인가. 짐승이 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이 글은 사보 모터스 라인에 연재되는 글입니다)


'천국보다 낯선'

낯선 곳에 가는 걸 원체 좋아하질 않는다. 그런 내가 20대 중반에 혼자 12시간 비행을 해서 말도 잘 통하지 않는(그 때는 영어가 젬병이었다) 멜버른의 그것도 한참 외곽에 있는 대학교 기숙사를 찾아갔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모험이었다. 홍콩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면서 포비아(Phobia)를 경험했다. 탑승시간은 30분밖에 안 남았는데 이국의 공항에서 길 잃은 청년이 겪었을 공포감을 생각해보라. 가까스로 비행기를 타고 멜버른에 도착해서 택시 타고 물어물어 기숙사에 도착했는데, 마침 토요일이었다. 주말이면 주변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 바람에 거의 이틀을 굶다시피 살아야 했다. 문밖을 나서면 외계인이 달려들기나 하는 것처럼, 기숙사 방에 콕 박혀서. 그 때 기숙사 벽 한쪽에는 내가 가져간 '천국보다 낯선'이라는 영화의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짐 자무쉬의 '천국보다 낯선'이란 영화는 영화보다 포스터를 먼저 알게 되었다. 영어로 'Stranger Than Paradise'라고 크게 적힌 포스터 속에는 두 남자가 차 밖에 서 있고 차 안에는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모두 선글라스를 낀 그 모습에 유난히 풍성한 뭉게구름이 피어난 하늘은 정말 이국적이었다. 영화는 못 봤어도 그 포스터는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어딘가 떠날 때 갖게 되는 막연한 설렘 같은 것들이 거기에서는 느껴졌다. 말 그대로 막연한.

멜버른 다운타운에서 빌려와 본 '천국보다 낯선'은 그러나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헝가리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찾아온 에바가 뉴욕에 사는 건달 친척 윌리와 그 친구인 에디와 함께 클리브랜드를 여행하면서 철도길에서 하는 대사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엄청 멀리 온 것 같은데, 여기도 똑같네." 그러니까 포스터에 있는 그들은 그렇게 멀리까지 천국처럼 낯설 것이라 여겨진 미국을 찾아왔지만, 여전히 다를 바 없는 스산한 거리에 서 있는 자신들을 발견한 것이었다. 영화를 보고 포스터를 보고 나니 그간 멜버른 생활에 적응해온 나 자신이 다시 보였다.

사실 피부색만 조금 달라도 마치 잡아먹을 것처럼 여기며 눈을 피하던 나는 어느새 동네 펍(Pub)에 앉아 주민들과 맥주를 마시며 안 되는 영어로 더듬더듬 농담을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이 때 음주영어를 한 탓에 술을 마셔야 영어가 되는 부작용이 생겼다). 이질적인 것에 대한 거부반응? 낯선 것을 워낙 싫어하는 나만큼 별의 별 포비아를 가진 사람도 드물다.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힘겨워 평생 친구도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사귀는 나로서는, 신종 인플루엔자니 방사능이니 하는 각종 살벌한 이질적인 것들의 틈입을 잘 견디지 못한다. 그래도 그나마 이정도 버티고 사는 건 아마도 그 때 멜버른에서 겪었던 '천국보다 낯선' 경험 덕분일 게다. 세상에 어디 낯선 곳(것)이 따로 정해져 있을까. 이 곳에 있으면 저 곳이 저 곳에 있으면 이 곳이 낯설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1년 후 밟은 한국땅에서 그 낯설음에 일순 포비아를 느꼈다. 맙소사! 인간의 간사함이라니.
(이 글은 사보 모터스라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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