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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느와르

부모의 원수를 갚는 복수극, 적의 심장부에 잠입해 스파이로 활동하는 언더커버, 자신의 정체성을 흔들어버리는 기억상실. 누가 봐도 ‘개와 늑대의 시간(이하 개늑시)’이 가져온 장치들은 액션 느와르에서 흔하게 사용되었던 것들이다. 여기에 원수지간인 부모를 가진 연인, 한 여자를 두고 우정과 사랑을 저울질하게 되는 형제 같은 캐릭터의 설정은 물론이고, 장르적인 허용을 한껏 활용하는 액션과 느와르의 관습적인 장면들까지를 각각 뜯어내서 보면 이 드라마는 기존 장르들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 각각의 장치들의 총합이 만들어내는 것은 단순한 등가의 결과물이 아니다. ‘개늑시’는 이 장르가 가진 다양한 관습적 장치들을 모으는 반면, 보다 복잡한 인간관계의 거미줄을 연결해놓는다. 적과 아군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그저 단순한 싸움이 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적과 아군이 관계, 이를테면 부자관계, 친구관계, 형제관계, 연인관계로 얽힌다면 말이 달라진다. 총구를 겨냥하는 적이 관계라는 무기로 총 든 자를 오히려 얽어맬 때, 그 총구의 총알은 적을 관통해서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날아온다. ‘개늑시’는 바로 이 상황 속에서 도무지 선인지 악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한 인간의 정체성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느와르다.

관계를 복수극과 엮어낸 느와르
이 드라마에 수많은 아버지들이 등장한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수현(이준기)과 서지우(남상미)는 모두 아버지가 둘이다. 이수현은 언더커버로 청방에서 활동하다 살해당한 친아버지와 그를 길러준 강중호(이기영)가, 서지우는 친아버지인 마오와 그녀를 길러준 서영길(정성모)이 그들이다. 여기에 기억상실로 케이가 된 이수현이 마오와 갖는 유사부자 관계를 포함시키면 아버지는 더 늘어난다.

이렇게 아버지가 많은 것은 이수현, 서지우, 강민기의 존재가 아버지와의 관계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대립하게 되지만 차마 그를 어쩌지 못하는 말 그대로의 개와 늑대의 시간을 겪게 만들기 위해 드라마는 주인공에게 수많은 종류의 관계의 그물을 씌워놓는다. 그러니까 아버지들은 그 관계의 핵심축인 셈이다.

“넌 누구냐? 내 아들이냐? 배신자냐? 케이.”, “내 이름은 케이가 아냐.”, “뭐든 상관없다. 넌 내 아들 케이였으니까.”이 대사들는 이 드라마가 가진 관계의 느와르를 집약하고 있다. 그리고 케이가 기억상실에서 이수현으로 돌아와 자살을 시도하려는 장면은 이 관계로부터 만들어진 어떤 행위든 고스란히 부메랑으로 되돌아오는 그 고통스런 상황, 개와 늑대의 시간을 고스란히 잡아낸다.

연기자들에 의해 살아난 장르
이 정체성이 유발하는 관계의 느와르는 복잡해 보이지만 이런 장르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마치 게임처럼 장르적으로 이해가 되는 구석이 있다. 마치 장기나 체스를 두듯이 어떤 기능을 하는 말을 하나 움직이면 그것이 판세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이라는 암묵적인 동의 혹은 규칙을 염두에 둔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장르 드라마들은 바로 이런 규칙에 충실한 드라마다. 이런 드라마들은 말의 움직임 즉 스토리 구성만큼 중요해지는 것이, 말이 제대로 움직여주는가에 해당하는 연기자들의 연기력이다.

‘개늑시’는 어찌 보면 연기자들에 의해 살아났다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장르 드라마 자체의 속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드라마가 가진 급변하는 상황 속에 놓인 인물을 얼마나 연기자들이 실감나게 연기하느냐가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양 끝단에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한껏 현실감에서 벗어나 가벼워질 수 있었던 드라마를 시종일관 무겁게 눌러 앉힌 김갑수와 최재성. 특히 최재성의 강한 카리스마는 드라마가 끝까지 달려올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을 제공했다. 이렇게 무게감이 제공되자 그 위에서 이준기, 정경호, 남상미는 한바탕 신명나는 연기력을 펼칠 수 있었다.

특히 이준기는 부모가 눈앞에서 살해당한 상처를 가진 이수현, 평범한 가정 속에서 성장한 이수현, 어느 날 잊었다 생각했던 원수를 만나 복수심에 불타는 이수현,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청방에 언더커버로 들어가는 케이, 거기서 기억을 상실하고 이수현을 버린 완전한 케이, 다시 기억이 되돌아온 이수현, 기억이 돌아왔음에도 여전히 케이 때의 습관(껌을 씹는)을 보이는 이수현… 등등. 끝없는 정체성의 혼동을 겪는 인물을 잘 소화해냈다. 게다가 부드러움에서 순식간에 광기로까지 변화시키는 연기력을 보여준 정경호와 사실상 한참 약화시켜버린 멜로 라인을 연기력으로 끄집어낸 남상미는 이준기의 연기와 조화를 이루었다.

‘개늑시’는 그간 시청자들이 목말라 했던 장르 자체에 충실한 드라마로 어느 정도 그 욕구를 만족시켜 주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만일 이 장르 드라마가 그저 장르들이 가진 법칙들을 풀어놓기만 했다면 그다지 주목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그렇다고 갑작스레 너무 낯선 장르의 과도한 실험을 했다면 그 역시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드라마는 장르 공식에다 우리에게 익숙한 관계의 드라마를 덧붙여 반보 정도 앞선 장르 드라마의 즐거움을 선사해주었다.

Posted by 더키앙

예쁜 남자와 거친 남자 사이, 이준기

참 지독한 배역을 맡았다. ‘개와 늑대의 시간’ 속에서 이수현과 케이 사이를 오가는 연기를 펼치고 있는 이준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연기자들과 캐릭터는 적어도 드라마를 찍는 동안에는 동일인물이다. 그렇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으면 캐릭터가 살 수 없기 때문.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 기억과 관련해 자기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인물은 비단 ‘개와 늑대의 시간’의 이수현만이 아니다. 그 연기를 하고 있는 이준기 역시 똑같은 개와 늑대의 시간을 겪고 있다.

이준기라는 배우를 발굴해낸 멘토의 김우진 이사는 “이준기의 인기는 순정만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중성적 매력에 있는 듯하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중성적 매력이란 여성적이란 뜻이 아니다. 여성적인 꽃미남의 외모를 갖추고 있지만 또한 남성적인 날카로움 혹은 터프함도 동시에 갖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무려 1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지금의 이준기를 있게 만들어준 캐릭터는 ‘왕의 남자’의 공길이다.

공길이란 캐릭터는 말 그대로 중성적이다. 겉으로 표현된 것은 여성적인 모습이 대부분이지만 그의 배역을 두고 게이라던가, 동성애 같은 말들이 나오지 않았던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그가 연기한 공길은 기본적으로 남성이지만, 모성애 같은 여성성이 극대화된 캐릭터였던 것.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연산군이나 장생을 보듬는 모성애로서의 여성성은 이준기의 여장남자 연기에 사회적 편견의 잣대가 적용되지 않게 했다.

문제는 공길이란 캐릭터를 벗고 스크린 밖으로 나온 중성적 이미지의 이준기가 공길을 통해 얻게된 이미지, 즉 여성성이 강조된 꽃미남, 예쁜 남자 같은 크로스 섹슈얼로 소비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후 이준기가 토로했듯이 ‘벼락스타가 짊어질 운명’ 같은 것이었다. 이미지 자체가 자산인 연기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로 굳어진 이미지는 양날의 칼이다. 연기자의 본분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다양한 역할로의 변신’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따라서 연기자 이준기에게도 똑같은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작용한다. 살해당한 부모의 아픔을 갖고 자라온 이수현이 강중호(이기영)의 보살핌 속에서 국정원 요원이 되고, 상처가 지워질만할 때 원수인 마오(최재성)를 만나는 장면에서 이준기는 첫 번째 개와 늑대의 시간을 겪었다. 평범한, 어찌 보면 ‘마이걸’의 서정우 같은 이미지의 이준기는 돌연 눈에 핏발을 잡아가며 총을 들이대는 거친 남자로 돌변했다.

하지만 그것은 신호탄이었을 뿐. 언더커버로 들어간 청방에서 갑작스런 사고로 당한 기억상실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원수 밑에서 충실한 개가 되어 비열한 썩소를 날리는 이준기는 복수심과 따스함의 이중성을 갖고 있던 이수현에서 어두운 그림자로서의 케이라는 인물을 끌어낸다. 그리고 결국 정해진 대로 케이가 자신이 이수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캐릭터는 더 복잡해진다. 그리고 모든 걸 포기하려 할 때,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처럼 청방에서 언더커버로 활동하다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은 기억의 양파껍질을 벗겨내는 과정처럼 보인다. 이수현이란 한 인물 속에서 벌어지는 것이지만, 거기에 기억이 덧붙여지면서 이 캐릭터는 다양한 프리즘의 빛깔을 쏟아낸다. 그리고 이준기가 연기하는 이수현의 이런 다양한 모습들은 이 드라마가 하고자하는 이야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복수심은 때론 훌륭한 동기부여가 된다”거나, “기억을 잃었다는 건 완벽한 언더커버 요원이 됐다는 걸 뜻한다”는 식의 대사들은 이 드라마가 한 가지 현상에 부여된 양면을 읽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걸 말해준다.

그래서 드라마를 죽 보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저 이수현이란 친구를 저렇게 힘들게 만드는 걸까. 물론 그것은 정보를 쥐고 있는 자들인 정학수(김갑수)나 마오(최재성) 같은 인물들이, 정보가 없는 자들을 이용해 벌이는 권력게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것 같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양파껍질 같은 기억을 갖게 된 인간이란 존재의 문제다.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기억이란 장치 하나로 숨가쁘게 변신하는 감정을 가진 존재. 따라서 이준기에게 이런 양면을 보여주는 이수현이란 캐릭터는 넘어야할 산이면서도 그 자체로 이미지 변신의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한 드라마에서 두 이미지가 다 보인다)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이준기는 개와 늑대의 시간을 겪고 있다.

Posted by 더키앙

달라지는 아줌마 드라마의 패턴

‘아줌마 드라마’ 하면 떠오르는 것은? 대기업 총수 아들과 그 아들에 낙점을 받은 신데렐라? 시어머니에게 구박받는 며느리? 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자식사랑으로 치부하면 다 되는 모성애? 그것도 아니면 억척 아줌마의 눈물겨운 홀로서기? 물론 아줌마들이 트렌디한 가족드라마에 시선을 빼앗기는 건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막연히 상정하는 ‘아줌마 드라마’라는 범주가 영원히 지속되는 건 아니다. 최근 들어 3,40대 아줌마들을 중심으로 시청하는 드라마의 패턴이 조금씩 달라지면서 과거 ‘아줌마 드라마’로 통칭되던 개념은 재정립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른바 ‘이모 드라마’의 출연이다.

아줌마요? 이모라 불러주세요
‘커피 프린스 1호점’은 청춘을 다루는 드라마. 등장인물의 연령대는 20대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를 가장 많이 본 시청자 층의 연령대는 어떻게 될까. 10대나 20대가 많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AGB 닐슨의 타깃별 시청점유율에 따르면 이 드라마를 본 시청자 중 30대 28.2%, 40대 19.1%로, 3,40대 점유율이 거의 50%에 이른다. 반면 10대(14.8%), 20대(18.5%)는 전체의 30% 정도를 차지한다. 이 중에서도 30대 여성이 19.4%로 가장 많이 나타난 걸 보면 이 드라마의 주 시청층은 30대 중년 여성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드라마 성공의 주 동력이 이른바 이모 팬들에게 있었다는 말이다.

7월 둘째 주 국립국어원 신어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모 팬’이란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10대∼20대 청춘 스타들을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중년 여성. 팬들이 보통 연예인의 이모뻘이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과거 젊은 스타들에 열광하는 팬층이 10대였다면 이제는 그 저변이 중년층으로까지 넓어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팬 미팅 자리나 각종 인터넷 팬클럽에서 이모 팬들의 활약은 점점 두드러지고 있다. 주지훈 같은 젊은 스타의 팬 미팅 자리에서 ‘오빠’ 대신 ‘지훈아’를 외치는 이들은, 특유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10대 팬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이 좋아하는 스타의 뒷심이 되고 있다. 아예 가입조건에 이준기씨보다 나이가 많아야 한다는 조건을 달고 있는 이준기의 팬클럽 ‘준스레이디’는 돈을 모아 이준기 모교에 장학금을 지원해주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드라마 성공, 이모들의 마음에 달렸다
중요한 것은 이들 이모 팬들이 미치는 드라마 성공에 대한 영향력이다. 준스레이디의 한 이모 팬은 ‘커피 프린스 1호점’의 성공이 그 드라마가 중년의 마음 속에 감춰진 순정만화 필을 건드렸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순정만화에서 막 나온 듯한 젊고 잘 생긴 미소년들이 등장해 예쁘게 사랑하는 모습이 이 드라마에 열광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멋진 장면에는 문자를 주고받으며 드라마를 볼 정도라는 이모 팬들은, 흔히 ‘아줌마 드라마 = 여성드라마’라는 공식도 깨고 있다.

AGB 닐슨의 조사에 따르면 전문직 장르 드라마를 표방하며 나온 범죄수사물 ‘히트’의 주 시청자층은 전체 시청자 중 3,40대 여성층이 무려 30%(30대 19%, 40대 12%)를 웃돈다. 이어 나왔던 ‘에어시티’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 전체 중 3,40대 여성이 25%(30대 13%, 40대 12%)다. 최근 시작해서 호평을 받고 있는 ‘개와 늑대의 시간’ 은 첫 방송에서 3,40대 여성층이 29%(30대 16%, 40대 13%)를 차지했다. 흔히 오인되고 있는 멜로 드라마 위주의 시청패턴을 할 것이라 여겨지는 중년 여성층들은 이제 액션과 서스펜스를 다루는 드라마에도 열광한다는 것이다.

뜨는 이모 드라마의 조건
최근 들어 드라마 여 주인공들의 연령대가 30대를 겨냥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경향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후부터 드라마에서 주목해온 30대 여성 시청층에 대한 희구는 이제 그 계보를 만들어도 될 정도가 되었다. 김삼순(김선아)에서 ‘여우야 뭐하니’의 고병희(고현정), 그리고 현재 방영되는 ‘9회말 2아웃’의 홍난희(수애)와 ‘칼잡이 오수정’의 오수정(엄정화)이다. 하지만 주인공의 연령대가 비슷하다 해서 ‘커피 프린스 1호점’, ‘개와 늑대의 시간’ 같이 소위 뜨고 있는 드라마와, ‘9회말 2아웃’, ‘칼잡이 오수정’을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어려운 것 같다.

그것은 ‘9회말 2아웃’, ‘칼잡이 오수정’이 어느 정도의 30대 감성을 가져가긴 하지만 여전히 결혼에 목매는 과거 아줌마 드라마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이들 드라마가 취하고 있는 여주인공들의 일에 대한 부분이다. 결혼에 목매는 여성을 그리기 때문에 홍난희나 오수정의 직업을 통한 자아성취 같은 부분이 상당부분 사라지면서 현대여성들의 또 다른 욕망, 즉 일에 대한 자아성취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는 것이다.

떴거나 뜨고 있는 이모 드라마의 조건 속에는 반드시 여주인공(혹은 남성이라도)이 분명한 자기 직업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저 ‘내 이름은 김삼순’의 김삼순이 그랬고, ‘여우야 뭐하니’의 고병희가 그랬으며, ‘커피 프린스 1호점’의 미소년들과 고은찬(윤은혜)이 그랬고, ‘개와 늑대의 시간’의 이수현(이준기), 강민기(정경호), 서지우(남상미) 심지어는 마오(최재성)가 그렇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제 모든 드라마들은 멜로나 장르를 떠나 전문직으로 갈 것이 요구되고 있다 할 것이다.

이모 팬들이 드라마에 요구하는 것
이모 팬들은 그저 갑자기 등장한 외계인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 사회에 일찍이 팬 문화를 만들었던 세대들이 이제 중년이 된 것뿐이다. 그들은 드라마를 보면서 젊음에 대한 향수를 가지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젊으며 적극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고 표현한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이 있는 홍대 앞을 기웃거리고, 고생하는 스텝들과 연기자들에게 줄 도시락을 싸들고 ‘개와 늑대의 시간’의 촬영장을 찾아갈 준비를 한다.

이들은 꾸준히 자신들의 감성에 맞는 드라마를 희구해왔다. 정말 느낌이 좋은 연기자, 느낌이 좋은 드라마를 찾으면서, 한편으로는 그 대체 욕구로 외국 드라마를 기웃거렸다. 미드가 주로 남성시청자들의 시선을 빼앗았다면, 일드는 정확히 이모 팬들의 시선을 잡았다. 바삭하게 잘 구워낸 듯한 쿠키 같은 일드를 보면서, 신파에 트렌디에 푹 젖어 습기를 먹어버린 우리네 드라마란 쿠키는 언제쯤 달라질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로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이제 아줌마 드라마라고 다 같은 것으로 분류하지 말자. 든든한 이모들이 있으니까.

Posted by 더키앙

윤은혜, 이준기, 수애, 그들의 변신에 박수를

연기자가 연기 변신을 하는 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증명인 셈. 하지만 이게 그리 쉽지 않은 것은 대중들이 바라는 이미지와 변신한 이미지의 간극이 클 경우이다. 너무나 강렬한 이미지로 고정되는 것은 그만큼 인기가 있다는 걸 의미하지만, 동시에 연기자들에게 그것은 족쇄로도 작용한다.

한번 가수출신 연기자라는 연기논란에 휘말린 이미지를 가지면 하는 역마다 연기논란을 일으키고, 한번 미소년 이미지로 강한 인상을 남기면 터프한 연기가 잘 먹히지 않으며, 청순 가련 이미지로 고정되면 명랑한 역을 맡기가 어려워지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자신이 가졌던 이미지와 다른 변화된 캐릭터를 요구한다면 어쩔 것인가. 그저 자신의 이미지가 먹힐 시대가 또다시 오기를 기다리기만 할 것인가. 아니면 과감히 연기변신을 시도할 것인가. 이런 면에서 보면 지금 윤은혜, 이준기, 수애가 몸부림치는 연기변신은 이들만의 과제가 아니다. 지금 연기자들 앞에 펼쳐진 시험대. 그것은 변신이다.

여자는 울고 남자는 인상쓰던 시대는 지나갔다. 청순가련형 여성 이미지와 마초적이기만 한 카리스마의 남성 이미지는 이제 더 이상 소비되지 않는 시대다. 언제부턴가 TV 속의 여성들은 점점 강인한 인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눈물을 흘리더라도 질척할 정도로 드러내지 않게 됐다. 반면 남성들은 거꾸로다. 오히려 눈물을 흘리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이미지가 더 많이 소비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대조영’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카리스마를 가진 캐릭터에서도 그렇게 다르지 않다.

이것은 IMF 이후 급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성들과, 감성적인 사회가 요구한 여성인력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사회진출이 활발해진 여성들로 전도된 남녀 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무너진 욕망을 대체하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캐릭터들이 포진한 남성 타깃 드라마(사극이나 전문직 장르 드라마 같은)와, 종속적이지 않고 독립적인 연애방식으로 상큼 발랄한 관계를 꿈꾸는 여성 타깃 드라마(청춘 멜로 드라마)가 공존하는 상황이다.

이 변화된 상황 속에서 고정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연기자들은 변신이 불가피해졌다. 윤은혜는 ‘궁’과 ‘포도밭 그 사나이’를 통해 명랑 소녀의 이미지를 굳혔지만 늘 따라다니는 꼬리표는 ‘가수 출신 연기자’의 연기논란이었다. 획기적인 변신이 아니면 넘기 어려운 이 꼬리표를 떼낸 것은 명랑 소녀에서 한발 더 나아간 남장여자라는 캐릭터이다. 여자를 포기하자 윤은혜는 새로운 이미지의 창출이 가능해진 것. 중요한 것은 그 남장여자라는 캐릭터가 지금 시대의 새로운 트렌드라는 점이다. 보이시한 여성이 인기가 있는 것은 수직적인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마치 남성과 남성 같은 우정의 관계로까지 수평적으로 발전되었다는 걸 보여주는 징후이다.

‘9회말 2아웃’이 보여준 수애의 변신은 이제 더 이상 울지 않는 여성 캐릭터 시대에 가장 잘 우는 연기를 소화해내는 연기자가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경우이다. ‘해신’에서부터 주목받은 수애의 연기는 이병헌과 호흡을 맞춘 ‘그 해 여름’을 통해 우는 연기자의 이미지로 굳어져갔다. 그런 수애가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에, 술 먹고 주사를 부리는 모습의 홍난희 역할을 맡은 것은 연기자로서의 대단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왕의 남자’를 통해 여성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 이준기의 경우는 거꾸로 남성적인 카리스마 변신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변신은 일단 성공적으로 보여진다. 살해된 부모의 복수극이라는 점도 연기자 이준기의 입장에서 보면 연기변신에 힘을 더해주는 요소이다. 새롭게 맞닥뜨린 원수 앞에서 분노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연기는 보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 정도의 연기변신이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물론 고정적 이미지를 가진 연기자들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연기자들에게 있어 고정적인 이미지는 양날의 칼과도 같다. 좋은 작품에서의 호연을 통해 얻어진 이미지는 고정화될 위험성을 늘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 그 이미지를 팔려고 하는 기획사와 시장이 만나면 자칫 그 이미지에 눌러앉게 되어버리는 경우도 생긴다. 연기자들이 연예인이 아닌 예술가로 느껴지는 순간은 그 속에서 늘 자신을 다잡고 새로운 연기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일 때이다. 그들의 도전에 박수를.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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