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반 발 앞선 장르의 즐거움, 개늑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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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발 앞선 장르의 즐거움, 개늑시

D.H.Jung 2007. 9. 7.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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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느와르

부모의 원수를 갚는 복수극, 적의 심장부에 잠입해 스파이로 활동하는 언더커버, 자신의 정체성을 흔들어버리는 기억상실. 누가 봐도 ‘개와 늑대의 시간(이하 개늑시)’이 가져온 장치들은 액션 느와르에서 흔하게 사용되었던 것들이다. 여기에 원수지간인 부모를 가진 연인, 한 여자를 두고 우정과 사랑을 저울질하게 되는 형제 같은 캐릭터의 설정은 물론이고, 장르적인 허용을 한껏 활용하는 액션과 느와르의 관습적인 장면들까지를 각각 뜯어내서 보면 이 드라마는 기존 장르들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 각각의 장치들의 총합이 만들어내는 것은 단순한 등가의 결과물이 아니다. ‘개늑시’는 이 장르가 가진 다양한 관습적 장치들을 모으는 반면, 보다 복잡한 인간관계의 거미줄을 연결해놓는다. 적과 아군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그저 단순한 싸움이 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적과 아군이 관계, 이를테면 부자관계, 친구관계, 형제관계, 연인관계로 얽힌다면 말이 달라진다. 총구를 겨냥하는 적이 관계라는 무기로 총 든 자를 오히려 얽어맬 때, 그 총구의 총알은 적을 관통해서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날아온다. ‘개늑시’는 바로 이 상황 속에서 도무지 선인지 악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한 인간의 정체성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느와르다.

관계를 복수극과 엮어낸 느와르
이 드라마에 수많은 아버지들이 등장한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수현(이준기)과 서지우(남상미)는 모두 아버지가 둘이다. 이수현은 언더커버로 청방에서 활동하다 살해당한 친아버지와 그를 길러준 강중호(이기영)가, 서지우는 친아버지인 마오와 그녀를 길러준 서영길(정성모)이 그들이다. 여기에 기억상실로 케이가 된 이수현이 마오와 갖는 유사부자 관계를 포함시키면 아버지는 더 늘어난다.

이렇게 아버지가 많은 것은 이수현, 서지우, 강민기의 존재가 아버지와의 관계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대립하게 되지만 차마 그를 어쩌지 못하는 말 그대로의 개와 늑대의 시간을 겪게 만들기 위해 드라마는 주인공에게 수많은 종류의 관계의 그물을 씌워놓는다. 그러니까 아버지들은 그 관계의 핵심축인 셈이다.

“넌 누구냐? 내 아들이냐? 배신자냐? 케이.”, “내 이름은 케이가 아냐.”, “뭐든 상관없다. 넌 내 아들 케이였으니까.”이 대사들는 이 드라마가 가진 관계의 느와르를 집약하고 있다. 그리고 케이가 기억상실에서 이수현으로 돌아와 자살을 시도하려는 장면은 이 관계로부터 만들어진 어떤 행위든 고스란히 부메랑으로 되돌아오는 그 고통스런 상황, 개와 늑대의 시간을 고스란히 잡아낸다.

연기자들에 의해 살아난 장르
이 정체성이 유발하는 관계의 느와르는 복잡해 보이지만 이런 장르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마치 게임처럼 장르적으로 이해가 되는 구석이 있다. 마치 장기나 체스를 두듯이 어떤 기능을 하는 말을 하나 움직이면 그것이 판세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이라는 암묵적인 동의 혹은 규칙을 염두에 둔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장르 드라마들은 바로 이런 규칙에 충실한 드라마다. 이런 드라마들은 말의 움직임 즉 스토리 구성만큼 중요해지는 것이, 말이 제대로 움직여주는가에 해당하는 연기자들의 연기력이다.

‘개늑시’는 어찌 보면 연기자들에 의해 살아났다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장르 드라마 자체의 속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드라마가 가진 급변하는 상황 속에 놓인 인물을 얼마나 연기자들이 실감나게 연기하느냐가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양 끝단에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한껏 현실감에서 벗어나 가벼워질 수 있었던 드라마를 시종일관 무겁게 눌러 앉힌 김갑수와 최재성. 특히 최재성의 강한 카리스마는 드라마가 끝까지 달려올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을 제공했다. 이렇게 무게감이 제공되자 그 위에서 이준기, 정경호, 남상미는 한바탕 신명나는 연기력을 펼칠 수 있었다.

특히 이준기는 부모가 눈앞에서 살해당한 상처를 가진 이수현, 평범한 가정 속에서 성장한 이수현, 어느 날 잊었다 생각했던 원수를 만나 복수심에 불타는 이수현,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청방에 언더커버로 들어가는 케이, 거기서 기억을 상실하고 이수현을 버린 완전한 케이, 다시 기억이 되돌아온 이수현, 기억이 돌아왔음에도 여전히 케이 때의 습관(껌을 씹는)을 보이는 이수현… 등등. 끝없는 정체성의 혼동을 겪는 인물을 잘 소화해냈다. 게다가 부드러움에서 순식간에 광기로까지 변화시키는 연기력을 보여준 정경호와 사실상 한참 약화시켜버린 멜로 라인을 연기력으로 끄집어낸 남상미는 이준기의 연기와 조화를 이루었다.

‘개늑시’는 그간 시청자들이 목말라 했던 장르 자체에 충실한 드라마로 어느 정도 그 욕구를 만족시켜 주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만일 이 장르 드라마가 그저 장르들이 가진 법칙들을 풀어놓기만 했다면 그다지 주목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그렇다고 갑작스레 너무 낯선 장르의 과도한 실험을 했다면 그 역시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드라마는 장르 공식에다 우리에게 익숙한 관계의 드라마를 덧붙여 반보 정도 앞선 장르 드라마의 즐거움을 선사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