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그림자', 이토록 유쾌해도 되는 걸까

'빛과 그림자'(사진출처:MBC)

'빛과 그림자'가 그리는 시대는 우리가 흔히 '어두웠던 시절'이라 부르는 독재시절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그 어두움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이렇게 유쾌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하지만 이 특유의 유쾌함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빛과 그림자가 대결하던 시대를 살아온 우리는 빛과 그림자의 싸움을 머릿속에 늘 그려왔지만, 사실 빛이 그림자를 내모는 방식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림자는 빛이 더 빛나면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빛과 그림자'의 유쾌함은 마치 시대의 어둠을 유쾌함으로 이겨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정치의 암울함에 맞서 딴따라라 불렸던 발랄한 쇼가 대결하는 드라마, 바로 '빛과 그림자'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기 마련. '빛과 그림자'라는 드라마는 그 통상적이지만 영원한 우리네 삶의 진실을 보여준다. 먼저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성공과 실패, 그 빛과 그림자를 오간다. 강기태(안재욱)는 순양극장을 소유하고 있는 지방유지 강만식(전국환)의 아들로 고민 없이 부유하게 자라지만, 밉보인 장철환(전광렬) 의원에 의해 몰락하게 되는 인물. 장철환의 사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아버지가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 후, 집안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반면 강기태네 집 식모의 아들인 차수혁(이필모)은 친구인 강기태를 배신하고 장철환 의원을 보좌함으로써 그와 함께 권력의 핵심으로 들어가게 된다. 한편 빛나라쇼단의 단장 신정구(성지루)는 강기태의 돈을 떼먹고 야반도주 하지만 그렇게 1년을 탕자처럼 지내고는 길바닥을 전전하는 삶을 살아간다. 반면 양태성(김희원)은 정혜(남상미)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전형적인 건달이었지만 월남에 가서 무기 밀거래를 하며 벼락부자가 되어 돌아온다. '빛과 그림자'들의 인물들의 인생역정은 이처럼 다이내믹하다. 하루아침에 그림자로 전락했다가도 어느 순간 빛으로 떠오르는 그런 인생.

이것은 그 시대가 가진 빛과 그림자를 떠올리게 한다. 군부 독재 시절로서 이유 없이 남산에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시체로 나오던 그 어두운 시대였지만, 또한 성공의 사다리가 지금처럼 꽉 막혀 있지 않고 도처에 있던 시대. 물론 그 성공에는 값비싼 대가가 치러졌지만 향수어린 시각으로 바라보는 당대란 그림자마저 추억처럼 여겨지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모두가 멈춰 서서 국기를 향해 경례를 하던 그 잿빛의 암울함은, 신정구과 강기태가 그 정지화면 위에서 도망치고 추격하는 장면이 발랄하게 삽입될 정도의 추억으로 그려진다.

사실 강기태라는 캐릭터 자체가 하나의 향수이자 추억이다. 도무지 이 인물은 절망하거나 비관할 줄 모른다. '골치 아픈 건 딱 질색'인 이 인물은 아버지가 죽고 몰락한 집안에서도 여전히 큰 소리 뻥뻥이다. 그래서 보통의 드라마가 누군가에 의해 몰락한 집안을 다시 세우기 위해 복수를 꿈꾸지만, 이 드라마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강기태라는 캐릭터는 복수보다는 자신의 성공을 더 꿈꾸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이 드라마는 가장 무거울 수 있는 강기태의 몰락을 그리면서도 시종일관 유쾌하다. 이것은 강기태라는 캐릭터의 힘이면서 지나간 일을 추억어린 눈으로 회고하는 이 시대극의 시선이 가진 힘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발랄함의 시선이 유지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드라마가 '쇼'를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부음을 듣고도 쇼 무대에 올라 바보 연기를 했다는 과거 코미디언들의 유명한 일화들처럼, 이 시대극의 쇼는 그 무대 뒤편의 그림자들을 덮어줄 만큼 빛으로 가득하다. 당대의 쇼 비즈니스는 안가에 연예인들이 불려가 노래를 불러야 할 정도로 어두운 면이 있었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쇼란 그 어둠마저 덮어버리는 화려한 무대가 아니던가. '빛과 그림자'는 그래서 정치와 얽혀진 어두운 시대의 쇼가 보여주는 양면을 보여주면서도, 거기에 어둠마저 시간이 지나면 빛으로 환산시키는 기억이 만들어내는 마법을 집어넣는다.

'빛과 그림자'가 주목을 끄는 것은 바로 이 추억의 시간여행이 가져다주는 특유의 유쾌함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한때 딴따라라 불리던 연예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어두운 정치권력, 그리고 뒷골목 건달들의 이야기들이 얽혀 있는 시대극의 무게를 갖고 있으면서도, 결코 발랄함을 잊지 않는다. 당대의 힘겨웠던 삶조차 이렇게 몇 십 년이 흐른 뒤 바라보면 한 바탕의 쇼처럼 아련해지는 모양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시각은 지금 현재 결코 쉽지 않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작은 위안을 준다. 힘겨워도 이것을 이겨내고 나면 이 또한 한 바탕 우리 삶의 즐거운 쇼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 딴따라라 불리던 그들이 이제 우리의 가슴 속에 별로 남은 건 그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유쾌한 쇼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딴따라라 불렸던 쇼가 당대 권력인 정치를 이겨내는 방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힘겨워도 빛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스스로 빛나는 것.

'자이언트'가 소화한 것, 다양한 장르, 시청층, 연기

실로 '거인'다운 소화력이었다. 드라마는 전형적인 시대극이지만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고, 그 장르들의 문법들을 꿀꺽꿀꺽 삼켜버렸다. 중요한 건 '삼켰다'는 것이 아니라 그걸 '소화해냈다'는 것. 시청자들이 원하고 필요한 것이라면, 그리고 흥미와 구미를 당길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삼켜서 기어이 소화해내고 마는 세계, 그것이 바로 '자이언트'의 세계였다.

시대극은 넓게 보면 사극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아주 가까운 역사를 다룬다는 것. 이것은 사소한 것 같지만 작품에는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낸다. 가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역사의 평가에 민감할 수 있다는 것이고 또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에 있어서도 어떤 한계를 지운다는 의미다. 그래서 '자이언트'는 초반부터 특정 정치인을 옹호하는 드라마로 오인 받았다.

하지만 '대조영'을 겪은 장영철 작가의 뚝심은 여전했다. 시대극이라는 특성에 걸맞게 실제 사건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면서도 장영철 작가는 그 속에 인물들의 대결에 좀 더 과감한 허구적 상상력을 끼워 넣었다. 인물들에게 끊임없이 제기되는 미션과 그 미션의 해결과정에 부딪치게 되는 대결구도는 사극의 장르적 특성처럼 '자이언트'의 꺼지지 않는 에너지원이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대극이 부여하는 현실감에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상상력을 펼쳐나간 점은 초반의 오인을 뒤집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라는 인식을 갖게 만든 것이다. 결국 이 뚝심은 오해마저 삼켜버리고 소화시키는 저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초반의 시청률 부진은 단지 이런 오해 때문만이 아니었다. 사극적인 대결구도와 치밀한 심리전으로 흘러가다 보니 정서적인 공감대가 따라오질 못했다. 물론 남성들은 이 사극적인 특징에 매료되었지만, 여성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자이언트'가 어떤 전환점이 된 것은 뿔뿔이 흩어졌던 강모(이범수)와 성모(박상민) 그리고 미주(황정음)가 다시 만나게 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자이언트'는 빠른 사건 전개와 반전이 주는 특유의 스릴러적인 특징으로 남성 팬들을 사로잡으면서, 동시에 가족드라마적이고 멜로드라마적인 요소들을 덧붙임으로서 여성 팬들까지 끌어들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서로 원수가 되어버린 가족들 속의 인물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강모는 다시 만난 정연(박진희)과 사랑에 빠지고, 미주는 민우(주상욱)와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그 아버지들이 원수라는 걸 알게 되고 헤어지게 된다. 다분히 작위적인 느낌이 있지만 말 그대로 이 멜로와 가족드라마적 요소들은 시대극이 궁극적으로 끌고 가려는 하드보일드한 이야기들 위에서 말랑말랑한 매력을 첨부했다. '자이언트'는 자칫 특정 세대로만 집중될 수 있었던 시청층을 삼키고는 대중성을 확보했다.

이런 다양한 장르의 공존이 가능했던 것은 장르를 잘 이해하는 유인식 감독의 공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뭐든 해낼 수 있는 든든한 배우들이 있었다. 이 작품의 배우들은 어느 한 장르의 결을 연기했다기보다는 주어지는 모든 장르를 소화해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에서 쉽지 않았다. 미주 역할을 한 황정음은 신파적이기까지 한 가족드라마의 여동생에서 갑자기 비운의 줄리엣이 되는 멜로드라마의 여자로 변신해야 했고, 그 후에는 가수로 성장해가는 성장드라마의 여성을 연기해야 했다. 민우 역할의 주상욱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역에서 여자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멜로 연기를 소화해야 했다. 박소태를 연기한 이문식은 적과 친구를 넘나드는 연기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재발견된 배우는 정보석과 박상민이다. 정보석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악역으로 처음부터 마지막회까지 혼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아무리 궁지에 몰아도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강한 카리스마는 이 드라마가 마지막까지 힘을 잃지 않은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박상민은 액션연기에서부터 맏형으로서의 애틋한 가족애를 선보이며 주목받았고,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나 마지막 부분에 뇌손상을 입은 모습까지 말 그대로 연기자로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장군의 아들' 이후 밋밋하게까지 느껴졌던 그의 이미지는 '자이언트'를 통해 확고하게 연기자로서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자이언트'는 이처럼 연기자들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연기의 극점까지 낱낱이 끄집어내 삼켜버렸다.

그래서 거의 모든 장르를 삼키고, 시청률을 삼키고는, 연기자들의 거의 모든 연기까지 끄집어낸 '자이언트'가 결국 소화해낸 것은 강남과 개발로 축약되는 한 시대의 모습이었다. 누군가는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혔고, 누군가는 복수하듯 처절하게 살아왔던 그 시대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꼭대기에 선 자의 처절함과 쓸쓸함'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뛰어왔던가. '자이언트'가 결국 돌아가는 길은 가족이다. 성모가 저 세상으로 떠난 후에 마치 그 자리를 메워주듯 막내가 찾아오고, 강모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 길은 아마도 살아남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기나긴 개발시대의 터널을 지나와서야 겨우 알게 된 행복의 의미를 찾아가는 길이 아니었을까.

사극을 넘어선 시대극의 저력과 그 문제점

시대극 전성시대다. ‘제빵왕 김탁구’가 7,80년대의 암울했던 시대적 분위기를 넘어서 성장해가는 김탁구를 시대극의 틀 안에서 그리며 5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면, ‘자이언트’는 강남 개발이라는 소재를 시대극으로 풀어내며 경쟁 작품이었던 사극 ‘동이’의 시청률을 앞지르는 이변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새롭게 시작한 ‘욕망의 불꽃’은 엄밀히 말하면 시대극이라고 하기가 어렵지만, 시대극이 갖는 장치들을 백분 활용하면서 연일 시청률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 시대극을 막강하게 만드는 걸까.

한때 시대극은 실패작의 전형처럼 여겨지곤 했다. 과거 방영되었던 ‘사랑과 야망’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다시 리메이크된 ‘사랑과 야망’은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에 이어진 ‘로비스트’나 ‘에덴의 동쪽’ 그리고 ‘태양을 삼켜라’ 같은 시대극도 거의 모두 실패했다. 이유는 당연하다. 과거 시대극들이 갖는 성공에 대한 집착이 어딘지 시대착오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미 드라마들은 성공이 아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의 대세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방영되고 있는 시대극들은 이들 작품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물론 성공에 대한 집착이 그 속에도 꿈틀대지만, 이들 작품들은 거꾸로 그 집착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에 더 집중한다. 따라서 현재의 시대극들 속에 성공에 집착하는 인물들은 주인공이 아니라 대부분 악역들이다. ‘제빵왕 김탁구’의 구마준(주원) 혹은 서인숙(전인화)이나, ‘자이언트’의 조필연(정보석) 같은 인물들을 끝없는 성공에 대한 욕망을 보이지만 그것이 결국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제빵왕 김탁구’가 ‘행복’을 주제로 빵을 만드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욕망의 불꽃’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나영이라는 성공하기 위한 욕망에 불타오르는 캐릭터가 바로 그것 때문에 얼마나 처절한 불행을 맞이하는가를 바라보는 드라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언니의 자리까지 빼앗아 버린 그녀는 결국 정점에 도달하지만 그 과정에서 생겨난 수많은 죄들이 고스란히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개발시대가 남긴 아픔을 이 욕망의 불꽃을 가진 캐릭터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작금의 시대극이 과거의 가치관에 머물지 않고 현재적 의미를 확보하게 되면서 오히려 시대극이 갖는 장점이 부각된다. 그것은 폭넓은 시청세대의 가능성이다. 과거는 넘어서야 할 막장에 가까운 시대의 장벽이지만 한 세대에게는 향수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성장드라마는 젊은 세대들의 판타지가 된다.

물론 시대극의 힘이 이처럼 막강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모두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런 시대극은 특성상 과거의 드라마들이 가진 자극적인 설정들을 끌어오게 마련이다. 그 설정들 자체가 시대의 아픔을 표현하는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설정들이 지나치게 자극으로 흐른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욕망의 불꽃’에서 낙태나 강간, 뺑소니 게다가 아이의 자살시도 장면이 등장하고, ‘자이언트’에서 납치와 폭력 수위가 높은 장면이 등장하는 것은 그 의미는 이해가 되지만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막장이라는 비판은 이런 부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시대극은 과거 어느 때보다 그 힘이 막강해졌다. 하지만 시대극이 본래의 목적인 시대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노력보다 자극에만 더 치중하게 될 때, 그것은 자칫 시대극의 동반추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자극은 더 큰 감각적인 자극을 요구하게 될 것이고, 결국 그것이 어떤 한계수위에 도달해 충족되지 않을 때 자칫 달라진 시청자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욕망의 불꽃', 욕망에 대한 탐구, 한 시대를 그리다

무엇이 그토록 그녀가 돈을 욕망하게 만들었을까. 대신 감옥에 간 부채감 때문에 친구 태진(이순재)이 놓고 간 돈다발을 아버지가 집어던지자, 그녀는 그 흩어진 돈을 주우려 아귀처럼 달겨든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는 아버지보다 돈이 더 좋다!"

'욕망의 불꽃'의 이 한 장면은 이 드라마가 그려내려는 이야기들의 많은 단서들을 제공한다. 먼저 불꽃 욕망을 품고 있는 이 여자, 윤나영(신은경)이라는 캐릭터.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고 싶어 부자와 결혼해 팔자를 고치려는 그녀의 뜨거운 욕망은 이 드라마의 시작점이다. 그녀의 욕망은 가족조차 불태워버릴 만큼 뜨겁다.

본래 태진의 아들 영민(조민기)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착하디 착한 언니 정숙(김희정)을 밀어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그녀는 자신의 욕망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슬쩍 자리는 내주는 정숙에게 그녀는 오히려 "너는 욕망이 없다"며 "그건 착한 게 아냐. 두려운 거지."하고 말한다.

그녀에게 사랑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결혼은 했지만 사랑이 없는 태진을 찾아 미국까지 간 그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태진에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건 불변의 진리가 아녜요. 변하잖아요."하고 말한다." 그녀에게 "사랑 따위'는 필요하다면 "만들어 가면 되는" 어떤 것이다.

신은경이 연기하는 나영이라는 캐릭터는 마치 막장드라마에 등장하는 희대의 악녀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거 다 차지할거야"하고 소리치는 그녀가, 인륜을 넘어설 만큼 욕망에 불타는 희대의 악녀가 아니라 연민의 대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여기에는 이 드라마가 시대극으로서 한 시대의 욕망과 상처를 나영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투영해보여주기 때문이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갖게 된 그 엄청난 욕망 속에는 개발시대를 살아낸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그려진다. 그녀의 꺼지지 않는 욕망은 그녀를 수직상승하게 만들지만, 그것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점이 되게 된다.

'욕망의 불꽃'이 막장에 가까운 설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막장드라마로 흐르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시대적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는 신은경의 캐릭터 덕분이다. 이 캐릭터가 갖는 욕망과 그로 인해 빚어진 비극은 그 속에 시대적 정서를 담아낸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한 가족의 치정극에 머물지 않는다. 나영이 그 어린 시절, "아버지보다 돈이 더 좋다"고 소리치던 그 시절, 악착같이 살기 위해서 우리가 버린, 혹은 잃어버린 것을 이 드라마는 그 후에 벌어지는 비극을 통해 들여다본다.

성공을 위해 가족까지 다 내버렸고, 사랑 따위는 만들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바로 그 파편화된 가족과 사랑 없는 욕망의 세계 속에서 파멸해간다. 인간이 품는 욕망에 대한 탐구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겪어낸 한 시대의 빗나간 욕망을 담아내고 있는 '욕망의 불꽃'. 그 욕망을 캐릭터로 보여주는 신은경의 연기가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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