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의 시대를 그린 '김탁구'와 '자이언트', 막장이 아닌 이유

눈물 젖은 빵을 먹지 않은 자와 인생을 논하지 말라? 가난과 비뚤어진 욕망들이 꿈틀대던 막장의 시대는 오히려 극적인 상황을 요하는 드라마로서는 보물창고나 다름없다. 거기에는 빵 한 조각을 놓고 가족을 생각하는 눈물겨운 가족애가 있고, 살기 위해 길바닥에서 뭐든 해야 했던 그 처절함이 있다. 신분제는 사라졌지만 자본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벌어지는 여전한 신분의 차이가 주는 강력한 계급의식이 있다. '자이언트'와 '제빵왕 김탁구'는 그 막장의 시대를 추억하는 드라마다.

막장의 시대를 추억한다고 해서 드라마가 막장인 것은 아니다. '제빵왕 김탁구'는 초반 '하녀' 컨셉트의 치정극처럼 시작했다. 거성가의 회장인 구일중(전광렬)이 보모이자 간호사인 김미순(전미선)과 하룻밤의 인연으로 김탁구(윤시윤)를 낳고, 반발하듯 구일중의 아내인 서인숙(전인화)이 비서실장인 한승재(정성모)와 불륜을 통해 낳은 아이, 마준(주원)을 구일중의 아이처럼 숨기며 키운다. 거기에 한승재가 마준을 거성가의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김탁구와 김미순을 제거하려 한다는 이야기는 전형적인 신파에 치정극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그런 막장의 늪으로 빠져들지 않는 것은 그 속도감 때문이다. 이런 신파적인 요소나 치정극적인 요소들을 이 드라마는 하나의 자극적인 요소로 끄집어냈다가 재빠르게 정리해버린다. 김탁구가 구일중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숨겼다면 출생의 비밀 코드로 넘어갈 텐데, 이 드라마는 일찍부터 이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자 이야기는 김탁구와 마준을 전면에 세운 대결구도의 드라마로 흘러간다. 선악구도는 아니지만,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대결구도 속에서 행복을 묻는 이 드라마의 메시지는 실로 건전하다. 막장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제빵왕 김탁구'가 막장의 시대의 이야기를 가족사적인 틀에서 풀어냈다면, '자이언트'는 좀 더 시대적인 틀에서 이 시대를 다루고 있다. 7,80년대라면 으레 떠오르게 마련인 그 군사정권 시절의 무법천지는, 이 드라마를 시대의 모험극으로 만들어낸다. 뭐 하나 상식적이지 않은 막장의 시대 위에서 가족애와 인간애를 품으며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 드라마는 묻는다. 성공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조필연(정보석)이 당대 군부시절의 사생아를 대변한다면, 맨 주먹으로 성공의 길을 열어내는 황태섭(이덕화)은 당대 사업가의 비뚤어진 초상을 대변한다.

그 시대 속에서 이강모(여진구)의 가족은 풍지박산이 난다. 가난하지만 단란했던 가족의 붕괴. 아버지와 어머니가 죽고 형과 동생들을 모두 잃어버린 이 불행한 강모의 가족사는 이 막장의 시대가 만들어낸 아픔을 표상한다. 그리고 드라마는 이 뿔뿔이 흩어놓은 가족이 다시 시대의 아픔을 넘어서 가족으로 뭉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형태는 시대극이고 그 속에 강력한 가족극이 숨겨져 있다. 재미있는 것은 '자이언트'는 시대극이면서도 지극히 사극이 갖는 극적 재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드라마를 그저 국책성 드라마라 치부할 수 없는 것은 주인공만이 아닌 모든 인물들이 처한 상황들을 극적으로 만들어내는 독특한 대결구도의 양상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강모의 성장담에 집중하는 만큼, 그 적이라 할 수 있는 조필연의 성장담에도 집중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제빵왕 김탁구'나 '자이언트'가 모두 '눈물 젖은 빵'의 시대를 그려내는 것은 아마도 그 막장의 시대가 가진 극적인 요소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수하게 되는 그 시대의 공기가 혼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로 들어가면 상황은 막장이다. 하지만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정의롭게 살아남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현재의 행복을 말해주는가 이 드라마들이 던지고 있는 메시지다. 막장의 시대를 다루는 '제빵왕 김탁구'와 '자이언트'가 막장의 늪에 빠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환타지 시대극 ‘에덴의 동쪽’, 역사왜곡보다 위험하다

‘에덴의 동쪽’의 기획의도에는 아무런 시대극에 대한 표지가 나타나질 않는다. 거기에는 대신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마음과 사랑, 심지어 영혼(정말?)까지를 되찾는 휴머니즘의 이야기라는 애매모호한 문구들이 들어가 있다. 물론 드라마가 어떤 현실에 부재한 것을 채워 넣으려는 욕망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환타지가 어떤 시대를 그릴 때는 신중해져야 한다. 드라마로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재해석은 무한히 열려 있어야 하지만, 그 재해석이 시대정신 자체까지 변형시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이 드라마는 60년대 사북 탄광촌에서부터 시작된 두 가족의 애증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 역사는 탄광업주인 신태환(조민기)과 노조위원장인 이기철(이종원)에서부터 비롯된다. 신태환의 사주로 이기철이 죽게되면서 양가는 철천지 원수지간이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운명의 장난처럼 두 사람의 아들이 뒤바뀌게 된다는 점이다. 복수극의 틀을 가지고 있는 이 드라마의 한 동력이 신태환의 이기철 살해에서 비롯된다면, 그 복수극과 동시에 진행되는 화해극은 이미 시청자들이 이 철천지 원수들의 두 아들이 바뀐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바로 이 지점 복수와 화해가 교차하는 그 운명의 쌍곡선은 이 드라마에 극적인 힘을 부여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기획의도에도 없는 시대극에 대한 징후들이 이 두 가족의 역사 속에 무차별로 끼여든다는 점이다. 탄광촌의 노사분규와 건설회사와 철거민들의 이야기, 학생운동과 고문통치, 전투기 도입과 로비스트 이야기 등등. 그것은 풍경만으로도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아픔을 무작위로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시대풍경의 꼭지점 위에는 신태환 혹은 신명훈(박해진)이 한 축을, 그리고 나머지 꼭지점 위에는 이동욱의 아들 이동철(송승헌)과 이동욱(연정훈)이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대립은 마치 그 시대에 벌어졌던 대립을 표징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런데 이 밑그림 위에 얹어진 인물들의 관계가 심상치가 않다. 먼저 이 뒤바뀌어진 아들들이 서로 대립하는 관계는 그것이 지속되고 강해질수록 더 강력한 파국(즉 사실이 밝혀졌을 때의 회한)을 예고하게 만든다. 이미 그 엇갈린 운명을 알고 있는 시청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대립은 안타까운 운명으로 치환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등장인물들의 대립이 결국은 오해로 인한 무의미한 것이었다는 식의 이런 스토리 구조는 그 밑그림에 깔려있는 시대의 문제 또한 너무나 간단하게 화해의 장으로 끌어내게 만든다. 거기에는 시대의 아픔을 양산했던 자들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혹은 법적인 문제들에 대한 역사적 처벌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것은 오로지 가족적인 핏줄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이 두 가족의 문제만이 아니다. 유난히 많은 이 드라마 속 원수지간의 사랑은 이동욱과 언론재벌 대한일보 민회장의 딸인 혜린으로 이어지고, 신명훈에게 겁탈 당하면서도 아이를 위해 그와 결혼하는 지현(한지혜)으로도 이어진다. 심지어 이동철의 여동생인 기순(전소민)은 자신을 납치한 왕건(김형민)을 오히려 살려주고 점점 가까워진다. 이들에게도 보이는 것은 원수가 저지른 사회적인 문제들(범법행위들)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만 그 위에서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개인적인 사랑으로 그 문제를 덮어버린다는 점이다. 그러나 과연 이 드라마가 연거푸 외쳐대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구호 하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일까.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 혹은 상투적인 종교적 문제로 바꾸어버리는 지점에서 이 드라마는 이상한 휴머니즘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 이동철의 아버지 이기철이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모두 품을 수 있어야 사나이”라고 남긴 그 애매한 말에서부터 드러난 바 있다. 잘못된 일이 있으면 그것이 자식이나 아버지라도 응당 그 벌을 받아야하는 것이 사회 정의의 기본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마치 그 지점에서 “그래도 핏줄인데...”하고 우리네 혈연 중심적 사고방식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악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신태환이 입만 열면 떠들어대는 “살아남기 위해 뭐든지 한다”는 그 논리는 자신의 추악한 욕망을 생존인 것처럼 위장하게 만들기도 한다. ‘에덴의 동쪽’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밑도 끝도 없는 주장은 자칫 잘못하면 시대의 아픔을 조장하고도 버젓이 잘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 심정적인 면죄부를 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때론 역사왜곡보다 더 위험한 일이다.

퓨전사극? 시대극? 아니면 제3의 무엇?

‘쾌도 홍길동’을 사극으로 볼 수 있을까. 흔히 시대적 공간적 배경이 과거이기에 이를 사극으로 생각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극이라 말할 때 그 범주 안에 이 드라마도 포함될 수 있는 것일까. 요즘은 참 쉬운 말이 퓨전사극이란 말이다. 역사를 다루되 사료와는 달리 상상력이 개입된 사극을 지칭하는 이 말은, 대충 정통사극이 아닌 것을 모두 지칭하는 개념처럼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정통사극에서 한참 멀어져 있는 ‘쾌도 홍길동’도 퓨전사극으로 부르면 무방한 것일까.

‘쾌도 홍길동’에는 역사적 시점이 없다
그럴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사극이라고 지칭할 때 그것은 주로 TV드라마를 말하는 것이며, 거기에는 최소한의 역사적 실제 사건이 들어 있을 때 그렇게 불린다. 하지만 ‘쾌도 홍길동’에는 역사적 시점이라는 것이 없다. 다만 원전인 허균의 ‘홍길동전’이 임진왜란 이후의 달라진 사회분위기를 담고 있다는 데서 그 시점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드라마 상의 왕인 광희(조희봉) 또한 실제 조선의 왕을 지칭하지 않고 있으며 훗날 왕위에 오른다는 광희의 동생 창휘(장근석) 또한 그 실제인물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역사적 시점만이 아니다. 국내 최초의 코믹사극을 주창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유로운 의상과 머리 스타일, 게다가 현대화된 사회의 풍경들은 이 드라마 속의 이야기를 역사적 공간의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밸리 댄스를 추는 기녀와 골프채를 든 양반, 새로 뺀 가마라며 자랑하는 인물들은 물론 그 자체로 충분한 웃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사극으로 보기에는 좀 무리한 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경우, 일본에서 주로 사용하는 시대극이나, 코스튬 드라마(costume drama)라는 용어가 적합할 지도 모른다. 일본에서의 시대극이란 사극과는 달리 역사적 상황만 드라마 속으로 가져오고 나머지는 다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드라마를 말하며, 코스튬 드라마는 실재했던 사건을 다루지는 않고 말 그대로 당대의 의상, 관습 같은 것을 살려 현실감을 넣는데 더 무게를 둔다. 이 드라마는 또한 중국의 무협드라마와도 궤를 같이 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무협지 속의 인물들처럼 날아다니고 놀라운 내공을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보다는 그 드라마 자체가 전하려는 메시지나 스토리의 재미에 더 천착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네 토양에서 만들어진 ‘쾌도 홍길동’을 일본의 시대극이나 중국의 무협드라마의 연장선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만이 갖는 만화적 상상력과 풍자의 세계가 공존하면서 동시에 퓨전사극의 영향을 보이는 긴장감 넘치는 전개가 엿보인다. 최근 만화적 상상력을 앞세운 젊은 세대의 감성을 적극 반영하고 있는 현대극의 또 다른 버전으로 읽히기도 하는 이 드라마는 우리네 사극의 뉴웨이브가 아닐까.

기존 사극에 대한 형식적 도발
중요한 것은 용어가 아니라 왜 이런 형식을 도입했는가 하는 점이다. 어쩌면 그 속에 이 엉뚱하고 발칙한 상상력을 가진 드라마의 존재이유가 숨어있지 않을까. ‘홍길동전’이라는 원전이 가진 도발적이고 세태 풍자적인 시선은 실로 당대로서는 분명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바로 이 혁명적인 시선은 지금 시대에 다시 만들어진‘쾌도 홍길동’에게도 똑같이 변화를 요구했을 터. ‘쾌도 홍길동’은 그저 웃기기만을 위해서 사극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배꼽춤과 섹시춤을 연출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존 사극에 대한 형식적인 도발이다.

이 드라마는 천편일률적인 사극 속의 멋진 척, 예쁜 척 하는 캐릭터들을 전복시킨다. 홍길동(강지환)은 주색잡기에 빠진 한량이며(물론 이것은 다 위장이지만), 허이녹(성유리)은 덜떨어진 듯한 말괄량이다. 스승은 전혀 스승처럼 보이지 않고 제자도 전혀 제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왕이란 자는 색주가처럼 차려진 별궁에서 기생들과 놀아나고 도적들과 기생들은 웬일인지 사연 있는 착한 사람들처럼 그려진다. ‘권력의 핵심’이라 스스로 일컫는 서윤섭(안석환)은 오히려 도적처럼 보이며, 그 사대부가의 딸은 자신이 기생으로 오인되어도 홍길동을 만날 수 있다면 기꺼이 수긍하는 당대로서는 놀라운 인물이다.

이러한 캐릭터들의 행보를 더욱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 현대적인 영상 연출 때문이다. 분할화면으로 홍길동과 그의 사부인 해명스님(정은표)이 각각 허이녹과 허노인(정규수)에게 자신들의 사제지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장면은 그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러한 형식 실험이 주는 유쾌함과 통쾌함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그것은 기존 사극들이 가진 엄숙주의를 한껏 풍자하는데서 비롯된다. 한없이 무겁고 비장하기까지 한 사극들에 대한 발칙한 상상력의 도전장을 내미는 이 드라마는 그래서 한참 보다보면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왜 좀 다르게 생각하고 상상하면 안 돼?” 물론 거기에 대한 대답은 “된다”는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