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경 작가는 왜 하필 정신분열을 멜로 소재로 삼았을까

 

멜로 소재에 정신분열이라니. 우리 드라마사에 이런 남자 주인공이 있었던가. <괜찮아 사랑이야>의 장재열(조인성)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봐왔던 멜로드라마의 남자 주인공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는 아프다. 어린 시절의 자신이 투영된 환시를 볼 정도로 아프다. 심각한 폭력을 겼었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에 의해 죽고 형이 대신 교도소에 갔다. 장재열의 집안은 그가 정신분열을 앓듯이 모두가 아프고 분열되어 있다.

 

'괜찮아 사랑이야(사진출처:SBS)'

대신 교도소에서 청춘을 보낸 형 장재범(양익준)은 그 억울함 때문에 동생인 장재범을 죽이겠다고 달려든다. 그에게서는 불쑥불쑥 내재된 공격성이 밖으로 표출된다. 어찌 보면 그는 심각한 폭력 행사를 해왔던 아버지를 닮았다. 출소한 후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쩔쩔 못하게 만드는 그 모습은 아버지의 폭력이 여전히 계속 이 집안에 이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는 정신과 의사인 조동민(성동일)에 의해 치료받고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치료가 필요한 환자다.

 

장재열의 어머니는 사실은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는 사실을 모른다. 순간적인 충동으로 살해를 했지만 기억이 그런 사실을 은폐하고 있는 것. 장재열이 아픈 것은 그 사실을 그는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형을 희생시켰고 그것에 대한 깊은 죄책감으로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간다. 자책의 끝은 자살이다. 이런 문제적인 가정사에 정신분열이라는 심각한 상태를 가진 장재열이라는 남자주인공은 그래서 단순한 멜로의 주인공에 머물 수가 없다.

 

왜 하필 노희경 작가는 이런 정신분열을 앓는 남자 주인공을 세웠던 것일까. 노희경 작가는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다고 작품의 의도를 밝힌 바 있다. 로맨틱 코미디로 포장을 했지만 본래 하고픈 이야기는 바로 그런 사회적 편견에 대한 것이라는 것. 따라서 <괜찮아 사랑이야>는 최근 들어 사적 멜로가 점점 사라지고 점점 늘고 있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멜로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멜로로 접근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의 문제가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폭력성은 개발시대를 거치며 압축성장 과정에서 경제적 지표로 포장되며 마치 없는 것처럼 치부되던 것이었다. 그 과정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 같은 거대한 사회적 트라우마도 있었고 비정규직의 문제에서부터 크고 작은 사회적 아픔들이 존재했다. 외형적인 경제성장으로 겉은 번지르르 해졌지만 속은 상처투성이인 우리 사회는 그래서 장재열식의 정신분열을 앓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아버지 시대의 폭력을 넘어섰지만 여전히 그 자장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 우리는 정치 현장이든 사회의 사건사고든 또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보고 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10년 연속 자살률 1위다. 왜 그렇게 자기 자신을 파괴로 몰아가는 것일까. 자신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장재열은 그래서 어찌 보면 이 정신분열을 앓고 있는 사회의 안타까운 희생자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드라마는 멜로드라마의 틀로 아버지의 문제를 살짝 저 뒤편으로 숨겨두고 있지만 장재열의 정신분열의 근원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폭력에서 비롯된다.

 

흥미로운 건 장재열을 사랑으로 보듬어 주는 정신과 의사 지해수(공효진)의 문제 또한 아버지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장애를 앓고 있다. 평생 어머니의 병수발을 받아야 하는 무기력한 존재다. 어머니가 다른 남자를 만나고 다닌 것을 그녀는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혐오한다. 그녀에게 남성과 스킨십조차 할 수 없는 트라우마가 생긴 건 어머니의 불륜 때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근원을 따라가면 무기력한 아버지가 서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괜찮아 사랑이야>가 그리는 아버지들의 모습은 이처럼 폭력적이거나 무기력하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부터 이 가정의 비극이 시작된다. 한 가족은 집단적인 정신증을 앓게 되고 다른 한 가족은 깊은 트라우마를 갖고 살아간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겪었고 또 지금도 겪고 있는 사회적 병증의 원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로 대변되는 사회적 권위들은 지금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명량>이나 교황이 신드롬을 일으키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래도 노희경 작가는 이 심각한 정신분열증을 겪고 있는 장재열로 대변되는 우리들에게 괜찮다고 등을 다독인다. 장재열이 정신분열이라는 건 슬픈 일이지만, 그의 주변에서 그를 위해 울어주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건 그나마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파리한 얼굴로 힘겨워하는 장재열을 껴안아 주는 지해수와 주변인물들에서는 그래서 이 작가가 우리 사회의 아픔을 보듬어주는 듯한 따뜻함을 느끼게 된다.

 

사랑은 과연 사회적 치유를 얘기할 수 있을까. 흔히들 사랑타령이라 표현하며 사랑의 가치가 경제적 지표 같은 현실적 가치에 비해 사치일 뿐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괜찮아 사랑이야>는 그 사랑이 어쩌면 우리 사회의 아픔을 치유할 유일한 길이라는 걸 말해준다. 물론 여기서 사랑은 사적인 사랑 그 이상의 소통이나 공감 같은 사회적 사랑을 포괄하는 것이지만.

 

<드래곤 길들이기2>에 끌리는 몇 가지 요소들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만을 놓고 보면 <드래곤 길들이기2>역시 전편만한 속편은 없다는 통설을 떠올릴 수 있다. 사실 이것은 <드래곤 길들이기>가 워낙 전편에서 파격적인 메시지를 던졌기 때문에 남게 된 잔상이다.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에게 주인공이 다리가 잘리는 사고를 보여준다는 건 웬만한 파격을 즐기는 제작자로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사진출처:영화 <드래곤 길들이기2>'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드래곤 길들이기>는 여타의 아동용 애니메이션의 틀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다. 아이도 재밌지만 어른들도 그 메시지에 공감했던 것. 이로써 <드래곤 길들이기>는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을 뛰어넘었고, 또 타자와 어떻게 공존해나가는가에 대한 주제의식을 살릴 수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드래곤 길들이기2>는 메시지에 있어서 조금은 약하다고 여겨진다. 물론 주인공 히컵이 다리를 잃는 대신 투슬리스와의 우정과 공존을 얻어냈듯이 이번 속편에서도 잃는 것과 얻은 것이 등장한다. 그것 역시 파격이라면 파격일 수 있지만 그래도 전편만한 충격을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블록버스터 영화는 메시지만을 보기 위해 보는 건 아니다. 압도적인 볼거리의 측면을 보면 이번 속편이 전편보다 훨씬 더 화려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히컵이 투슬리스와 함께 비상하는 장면이나 훨씬 더 스케일이 커진 전쟁신. 그리고 무엇보다 다양해진 드래곤 캐릭터들은 이 영화가 메시지면에서 약해졌다고 여겨지면서도 전체적으로 힘을 잃지 않는 이유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아이들이라면 누구나(어른들 역시 마찬가지지만) 갖게 되는 애완동물 길들이기의 욕망을 자극한다. 애완동물이 사람에게 주는 상반된 감정은 타자라는 두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을 하게 될 때 느끼는 즐거움이다. <드래곤 길들이기>가 전편에서 드래곤과 인간의 공존을 그리면서 관객에게 부여한 감정이 그것이다. 귀여움과 용맹함을 겸비한 투슬리스는 그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완벽한 캐릭터다.

 

물론 히컵 엄마의 등장은 조금은 생뚱맞은 느낌이 있지만 그래도 그녀가 등장해 히컵이 그렇게 드래곤과 교감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일종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해주는 장면도 그리 나쁘지 않다. 다만 이 과정에서 오랜만에 가족이 모이는 화기애애함을 보여주면서, 이미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긴박감이 상당부분 사라진 점은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그래도 엄마의 등장은 이번 작품의 방점이 히컵의 성장에 놓여 있다는 것을 두고 보면 괜찮은 설정이라 여겨진다.

 

전편이 드래곤과 인간의 대결과 공존을 그렸기 때문에 무언가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할 <드래곤 길들이기2>가 선택한 건 드래곤과 드래곤의 대결이다. 그 거대한 드래곤 전쟁의 볼거리는 더욱 커졌지만 이것이 전형적인 선악 구도로 단순화된 점은 아쉬운 면이다. 적어도 <드래곤 길들이기>를 보러온 관객이라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조금은 새로운 대결을 보고 싶어했을 수 있다.

 

<드래곤 길들이기2>는 확실히 전작이 남긴 메시지의 강렬함을 보여주진 않는다. 하지만 그 독특한 <드래곤 길들이기>의 세계가 가진 다양한 볼거리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다양한 캐릭터들의 향연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만일 3D로 보게 된다면 투슬리스와 함께 하늘을 비행하는 느낌이 어떤 것인가를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드래곤 길들이기2>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영화다.

 

세상을 보는 두 가지 눈, 다름 혹은 같음

당신에게 '다르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나와 다르기 때문에 당신은 그를 배척하는가. 아니면 거꾸로 같은 점을 찾는가. '초능력자'는 오락영화의 외피를 갖고 있지만 그 겉껍질을 벗겨내고 나면 그 속에 꽤 진지한 질문이 들어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제목은 '초능력자'이지만, 그 타인을 보는 것만으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초인(강동원)이 한쪽 다리가 없어 의족을 끼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또 그 초인의 능력이 유일하게 미치지 않는 단 한 사람, 임규남(고수)이 마지막에 전동휠체어를 탄다는 것 역시 아이러니다. 왜 이 영화의 초능력자들은 그 엄청난 힘을 가졌음에도 마치 장애를 가진 사람들처럼 그려지는 걸까.

'초능력자'는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가진 이들이 등장하지만 여타의 슈퍼히어로 영화처럼 그들이 지구를 구한다거나, 멸망시킨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공간도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지 않고, 서울의 한 공간, 그것도 세운상가나 시장통 같은 지극히 서민적인 공간에 국한되어 있다. 눈으로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초인이 하는 것은 지구를 손에 넣는 것이 아니다. 그저 전당포나 사채를 빌려주는 회사, 은행 같은 곳을 털어 먹고 사는 게 그가 하는 일이다. 그에게는 야망이 없다. 다만 이렇게 다른 존재로 태어나 다르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에 대한 저주가 있을 뿐이다. 지구 전복의 욕망이 거세된 초인이 가진 유일한 욕망은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비범함이 가진 욕망과 그 욕망의 올바른 사용, 즉 정의에 대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비범함이 다름이 되고 다름이 차별이 되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또 다른 축에 서 있는 비범한 존재, 임규남이 외국인 노동자들과 더불어 형 동생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라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임규남은 다른 존재에 대해서(사실 나와 타인은 모두 다른 존재들이다) 다른 점을 찾기보다는, 같은 점을 찾는 인물이다. 그는 타인과 공감하려하고 소통하려 한다. 따라서 어느 날 맞닥뜨린 초인이 '다르다'는 그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사람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죽이는 것에 임규남은 분개한다. 흥미로운 것은 초인이 타인을 마음껏 죽일 수 있는 것은 그들을 '다른 존재'로서 인식하기 때문인 반면, 임규남이 지나가는 행인의 불행을 막기 위해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 몸을 던지는 것은 그들을 그래도 '같은 존재'로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초인과 임규남의 '다름'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의 싸움처럼 보인다.

이런 진지한 질문들이 넘쳐나는 '초능력자'는 그래서 그저 슈퍼히어로물을 기대하고 보는 관객의 뒤통수를 친다. 대결의 롤러코스터를 신나게 질주하기보다는 타인들 앞에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갈등상황들이 계속 전개되면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을 진지한 마음으로 듣다보면 나중에 "남들과 다르단 거 정말 힘들다 그치"하고 묻는 초인과 그 다르다는 것을 차별로 인식하는 초인에게조차 "너 이름이 뭐냐?"고 묻는 임규남의 의미심장한 대사가 주는 지적인 쾌감을 가질 수도 있다.

'초능력자'의 그 능력이 눈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이 작품이 가진 메시지를 명확하게 한다. '초능력자'는 세상을 보는 인식의 문제를 초인과 임규남의 대결로서 그려내는 것이다. 세상에 우리는 모두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그런 우리들이 타인을 보는 시각은 두 가지다. 저들은 나와 다르다는 시각과, 저들은 나와 같다는 시각이다. 다른 점을 찾는 시각이 20세기까지의 분류의 시대를 이끌어왔다면, 같은 점을 찾는 시각은 21세기의 통섭의 시대로 열리고 있다. 지금은 제레미 리프킨이 말하듯 '공감의 시대'다. 당신의 눈은 어느 쪽인가. 여전히 타인과 나를 구별 짓고 그것을 심지어 차별로까지 여기는 초인의 눈인가, 아니면 타인과 공감하려는 임규남의 눈인가. 강동원의 반짝거리지만 어딘지 외계인 같은 눈인가, 아니면 고수의 흐리멍덩해 보여도 어딘지 정감가는 눈인가.

로봇다리 보다 든든한 가족을 가진 세진이의 희망가

세진이는 참 없는 것투성이다. 먼저 두 다리가 없고 오른손 손가락이 없다. 태어났을 때는 가족도 없었다. 남들 다 가는 유치원도 34번이나 퇴짜를 맞았고,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친구도 없었다. 아니 없는 정도가 아니라 왕따에 심한 놀림을 받기 일쑤여서 차라리 학교가 없었으면 했을 정도였다. 수영을 배우려 했지만 수영할 수영장이 없었고, 가르쳐줄 코치 선생님이 없었다. 외국에 수영대회를 나갈 때면 동행해주는 코치나 감독도 없어서 현지 적응하는데 애를 먹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가진 것 없는 세진이가 가진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어느 날 그의 앞에 나타나 그를 안아준 엄마였다. 엄마를 만나고 나서부터 두 다리도 생겼고 손가락도 생겼다. 그리고 가족이 생겼다. 학교도 다닐 수 있었고 친구도 사귈 수 있었다. 춤도 배우고 스키도 타고 볼링도 치고 마라톤도 완주하고 록키산맥도 등반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영을 배울 수 있었다. 엄마는 없는 수영장도 만들어주었고, 가르쳐줄 코치 선생님도 찾아주었다. 외국에 수영대회를 나갈 때도 늘 엄마가 옆에 있었다. '거위의 꿈'과 '나는 문제없어'를 응원가처럼 부르는 엄마는 세상 그 누구보다 뛰어난 코치이자 감독이었다.

'휴먼다큐 사랑-로봇다리 세진이'편에서는 저 스스로를 무서운 엄마, 나쁜 엄마라고 부르는 양정숙씨와, 그 엄마를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세진이의 희망가를 들려주었다. "병신자식 데려다가 앵벌이 시킨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엄마는 세진이 앞에 저 스스로 모진 현실이 되어야 했다. 남들 일어나서 걷기 시작할 때, 먼저 넘어지는 법을 가르쳤고, 한창 예쁜 말들을 배워야할 때, 병신, 등신, 장애인 같은 나쁜 말을 가르쳐야 했다. 그만큼 혹독한 현실 앞에 세진이를 당당하게 서게 하기 위해서였다. 세상은 세진이 같은 장애를 가진 아이가 넘기에는 너무나 모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없는 두 다리를 만들기 위해 쓰러진 아이를 끊임없이 일으켜 세워야 했고, 병신소리에 가둬놓고 때리고 온갖 모욕을 주는 학교에 가기 싫다 우는 세진이를 "오늘은 아닐 거라고 매일 달래서" 학교에 보내야 했다. 없는 친구를 사귀기 위해 세진이는 안간힘을 써야 했고, 밤마다 자기 전에 보통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수없이 기도를 해야 했다. 수영장 물 더러워진다고 소독해놓고 가라는 수모를 받으면서도 엄마는 하루 여섯 시간을 수영장 청소를 해가며 세진이에게 수영장을 마련해주었고, 그렇게 만날 손이 부르터가지고 오는 엄마를 보며 세진이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원한 것은 세진이가 애기였을 때 말했던 것처럼 그저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었다.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엄마에게 세진이는 이제 제법 어른스럽게 말한다. "그냥 우리들 앞에서 울어. 가족이 있는 한 가족 앞에서 풀어야 돼. 그게 가장 좋은 약이야." 엄마와 함께 '거위의 꿈'을 노래하던 세진이는 이미 그 엄마 뱃속 같은 물속에서 자유로이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거위가 날아오르는 그 꿈을 말이다. '휴먼다큐 사랑-로봇다리 세진이'편은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채 태어났지만 모든 것을 갖게 된 세진이를 통해,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칫 소중함을 잊고 지내왔던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주었다. 어떤 시련 앞에서도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 가족이란 실로 그 어떤 로봇다리보다도 든든한 존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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