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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네모난 세상

우리네 영웅들은 왜 서민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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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은 지금 서민들의 영웅을 원한다

영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선덕여왕'은 대부분의 사극이 그러하듯이 수많은 영웅들의 탄생과 성장을 그려냈다. 그 중 덕만(이요원)과 미실(고현정)은 난무하는 칼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세 치 혀만으로도 충분한 정치적 지도력을 선보이며 여성 영웅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여성성의 시대, 이 여성 영웅들의 리더십은 꿈꾸지 않는 작금의 현실 정치가 희구하는 것으로, 대중들은 그 강력한 판타지 속으로 빠져들었다.

덕만과 미실이 그 시대의 정점에 서서 그 통치를 통해 현실을 개척해나가는 영웅이라면, '아이리스'의 현준(이병헌)은 시대가 꺾어버린 개인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래서 그것이 결국은 시대를 바꿔버리는 그런 영웅이다. 그 시대란 다름 아닌 남북분단의 상황이고, 현준은 그것을 고착화시키려는 아이리스와 홀로 대결하는 영웅이다. 남북이라는 소재 때문에 현준은 구태의연한 냉전시대의 영웅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이리스'가 현준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남북의 대결이 아니라 집단과 개인의 대결이기 때문이다.

'히어로'의 도혁(이준기)은 서민들의 영웅이다. 삼류잡지사 기자였다가 잡지가 폐간되자 전직 조폭이었던 용덕(백윤식)과 용덕일보를 창간하는 도혁이 싸우고 있는 것은 대세일보라는 거대 언론이다. 물론 도혁은 장총찬 같은 주먹도 아니고, 그렇다고 필력이 뛰어난 기자도 아니지만 그를 '영웅'이라 부르는 것은 대세일보로 상징되는 정의가 사라져버린 시대에 사라진 영웅을 거꾸로 말해준다. 도혁은 정의 하나를 쥐고 있는 인물로서 이 시대의 영웅이 된다. 현실에 존재하는 많은 대세일보 같은 언론사들의 정치적 행보들은 도혁 같은 맨주먹의 정의로운 행동을 대중들이 희구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대중들의 영웅에 대한 희구는 안방극장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는 고전 속의 영웅을 현대로 불러들인다. 홍길동의 후손들이 살아남아 아직도 홍길동이 하던 '대도의 길'을 걷는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홍길동의 후예'가 그렇고, 설화 속의 인물이 현대에 깨어나 세상을 어지럽히는 요괴들과 한판 승부를 벌이는 '전우치'가 그렇다. 이것은 홍길동과 전우치 같은 이야기가 당대 서민들의 억압을 풀어주는 시대의 영웅으로서 탄생한 것과 맥락이 같다. 이들은 현 시대의 억압 속에 답답해하는 대중들의 마음 한 구석에서 탄생한다.

'홍길동의 후예'는 이른바 '좋은 도둑과 나쁜 도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겉으로 보기엔 착한 일을 하는 것 같은 경제인 이정민(김수로)은 사실은 대중들의 피를 빠는 이 시대의 탐관오리 즉 나쁜 도둑이고, 홍길동의 후예인 홍무혁(이범수)은 그의 금고를 털어 사회에 기증하는 좋은 도둑이다. 이 영화가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들 사이에서 취하고 있는 자세는 흥미롭다. 이정민은 피규어 매니아로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들(예를 들면 슈퍼맨이나 배트맨 같은)이나 재패니메이션의 로봇들을 수집하는데, 그의 캐릭터는 종종 이 슈퍼히어로들을 대변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러니 홍무혁이 이정민과 벌이는 대결은 한편으로 보면 이들 할리우드와 일본의 영웅들과 우리네 서민적인 영웅이 벌이는 대결로도 보여진다.

이러한 영웅의 서민적인 면모는 우리네 영웅상의 한 특징이다.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들이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하는 자들이라면, 우리네 서민적인 영웅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들은 지구적인 고민보다는 당장 서민들이 갖고 있는 고민들을 풀어주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서민이 삭제된 정치이기도 하고(선덕여왕), 집단이 꺾어버린 개인(아이리스)이기도 하며, 정의가 사라진 사회(히어로)이기도 하고, 나쁜 도둑들이 판을 치는 세상(홍길동의 후예)이기도 하다. 이 영웅들의 서민친화적인 모습은 그 권위적인 모습을 던져버리는 것에서부터 아예 코믹한 영웅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진다.

특히 우리네 영웅을 다루는 영화들이 대부분 액션과 함께 코미디를 장르적 특성으로 갖고 오는 점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네 영웅은 볼거리라기보다는 시대적 공감에서부터 탄생하고 있다는 징후일 것이다. 이러한 서민적 영웅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통쾌함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날라 다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 날카롭게 숨겨진 풍자의 칼날이 이 시대의 억압을 풀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렇게 이야기 속에서 영웅들이 쏟아져 나오는 양상은 이 시대가 가진 억압들을 말해주기도 한다. 대중들은 지금 영웅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서민적인 영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