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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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 울기 시작하다

D.H.Jung 2006. 12. 12.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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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도 주로 남자들이 울었다. ‘왕의 남자’의 이준기, 감우성이 그랬고, ‘라디오 스타’의 박중훈이 그랬다. ‘도마뱀’의 조승우’, ‘가을로’의 유지태, ‘그 해 여름’의 이병헌이 그랬으며 ‘비열한 거리’의 조인성,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강동원, ‘해바라기’의 김래원이 그랬다. 이제 멜로 드라마 속 눈물의 주체는 여성에서 남성으로 자리 잡아가는 중이다.

이러한 징후는 이미 예고되었던 일이다. 과거 여성 잔혹사적 관점의 내러티브를 갖고 주로 여성 관객의 눈물을 쏙 빼게 만들었던 신파는 이제 달라진 환경에서는 더 이상 카타르시스를 주지 못한다. 신파에 반발해 나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남성 중심적 권위주의로 늘 회귀했던 로맨틱 코미디(예를 들면 결혼이야기나 미스터 맘마 같은)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은 멜로드라마의 주 소비계층인 여성 관객들의 사회적 위치와 의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로써 9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남성 주인공의 눈물(접속, 약속, 편지, 8월의 크리스마스 등등)’은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심지어 여성에서 남성으로 순치된 이 내러티브는 이제 과거적인 신파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는데, 그 신호탄은 ‘파이란’과 ‘너는 내 운명’일 것이다.

올해 누가 누가 더 잘 울었을까
먼저 ‘왕의 남자’. 제목에서부터 느껴지지만 이 영화는 남자들에 의해 그 눈물의 카타르시스가 만들어진다. 여성으로 등장하는 강성연(장녹수 역)이 있지만 영화 속에서 그녀는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준기, 감우성, 정진영의 남성 삼각관계에 더 집중되어 있다. 이런 경향은 이준익 감독의 다음 작품이었던 ‘라디오 스타’에도 이어진다. 물론 여기서는 남성들의 우정을 그리고 있지만 여전히 두 남성의 드라마가 눈물의 진원지이다.

‘도마뱀’의 조승우는 20년 동안 제 자리에서 그녀(강혜정, 아리역)를 기다린다. 그녀를 붙잡으려는 순간, 그녀는 영원히 그를 떠난다. ‘가을로’의 유지태는 한 순간의 사고로 사랑하는 연인(김지수, 민주역)을 잃고 10년 째 그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그는 10년 후 뜻하지 않은 여행 속에서 이미 떠나버린 연인의 사랑을 느끼며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 해 여름’의 이병헌은 시대가 허락하지 않은 사랑을 가슴으로만 묻고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처럼 자작나무가지를 타고 날아온 그녀의 사랑에 그는 오열한다. 재미있는 건 이들 남성들이 모두 제 자리에서 떠난 여인을 기다리거나 그리워한다는 사실. 과거의 능동적 남성 - 수동적 여성의 틀은 이제 거꾸로 뒤집어졌다.

한편 남자들은 그 고단한 삶 속에서 눈물을 터뜨렸다. ‘비열한 거리’의 조인성은 영화 속에서 조폭으로 그려지지만 사실 평범한 샐러리맨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그는 결국 샐러리맨이 소모되는 그 시스템 속에서 눈물의 최후를 맞이한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강동원은 가난 속에서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사는 게 지옥 같았던 그가 한 여인을 만나 살고 싶어졌을 때 그는 사회의 단죄를 받는다. ‘해바라기’의 김래원은 가족 하나 없이 자란 인물로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간다. 감옥에서 나와 드디어 자신도 가족을 갖게 되었을 때, 그것은 폭력으로 파괴되고 그는 울부짖는다.

여자들은 웃고, 남자들은 울다
멜로 드라마 속에서 남자들은 저들끼리 사랑하고 우정을 나누며, 떠나간 연인을 기다리고 그리워하거나, 고단한 현실 속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들은 울었다. 반면 로맨틱 코미디 속에서 여자들은 달콤 살벌하게 남자를 괴롭히거나(달콤 살벌한 연인), 작업의 정석을 보여주거나(작업의 정석, 2005년 12월작), 로빈을 꼬신다(미스터 로빈 꼬시기). 이제 로맨틱 코미디는 여자들의 웃음을, 멜로 드라마는 남자들의 눈물을 먹고 자라나고 있다.

스크린 속 이야기지만 이것은 또한 현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IMF 이후부터 위축되기 시작한 우리네 남성들의 어깨와, 동시에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진 것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대변한다. 재미있는 건 남자들이 울거나 여자들이 웃거나 그 주 관객층이 여성이라는 점이다. 여성들은 이제 구질구질하게 눈물 흘리는 여성들보다는 상큼 발랄한 여성을 원하며, 만일 눈물을 흘리는 여성들이라 하더라도 그 옆에 더 펑펑 울어주는 남성을 원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