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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싸인', 그 숨 막히는 스릴러의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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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인'은 현실과 어떤 연결고리를 맺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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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인'(사진출처:SBS)

세상은 좁고, 사건은 넘쳐난다(?). '싸인'의 스토리 구조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이렇지 않을까. '싸인'은 법의학을 그 중심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그 스토리는 법의학에만 머물지 않는다.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건사고들을 정치권과 검찰, 경찰, 법의학자 등의 역학관계를 통해 다차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 회에 두 개의 사건을 병렬적으로 그려내면서, 이 많은 입장들이 들어가기 때문에 드라마는 느슨해질 여유를 주지 않는다. 끊임없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러과 추격전, 추리의 연속이 '싸인'이라는 드라마의 진면목이다.

어두운 밤길, 급하게 귀가하는 여자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그 뒤를 쫓는 그림자의 발길도 빨라진다. 그리고 결국 벌어지는 살인의 현장. 이 묻지마 살인이 환기시키는 것은 사건사고가 넘쳐나는 현실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여주인공 고다경(김아중)의 동생이 당한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드라마지만 어찌 보면 이 설정은 지나치게 우연적이다. '싸인'이 보여준 일련의 사건들이 대부분 이렇게 주인공들과 연관되어 있다. 한 회사에서 벌어지는 독극물에 의한 연쇄살인은 윤지훈(박신양)의 아버지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것은 또 그 아버지를 부검한 정병도(송재호)와도 관련되어 있었다.

또 윤지훈이 수사하고 있는 가수의 의문사 사건은 그가 국과수에서 밀려나게 되었던 사건이기도 하다. 왜 '싸인'은 개연성을 어느 정도 양보하면서까지 사건과 인물들을 밀접하게 그리는 걸까. 이유는 명백하다. 검찰과 경찰, 법의학자가 사건을 파헤치는 그 동기부여를 좀 더 강하게 그리려는 의도다. 그저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들의 사인을 밝혀내는 것보다, 죽게 된 가족의 억울함을 풀어내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훨씬 극적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주인공과 계속해서 연루되는 사건들은, 세상에 벌어지는 사건사고가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님을 드러내기도 한다. 스릴러가 갖는 스토리 구조의 비결은 비일상적인 사건을 긴장감 넘치게 그리면서, 그것이 일상적인 내 이야기일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싸인'에 등장한 사건사고들이 우리가 현실에서 봐왔던 사건들을 연상시키는 것 역시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드라마와 현실은 어떤 연결고리를 갖게 된다.

게다가 사건을 수사해가는 과정에서 그 당사자들 역시 위험에 처하게 된다. 정우진(엄지원) 검사는 게임 시나리오대로 살인을 저지르는 살인범에게 공격당하고, 공범이 등장하면서 잡혔던 용의자가 풀려나면서 그 위협은 다시 고다경에게로 향한다. 본격적인 멜로는 아니지만 정우진과 사랑하는 관계가 된 강력계 형사 최이한(정겨운)은 이 묻지마 살인이 이제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루된 사건으로 변모한다.

사건을 계속해서 터지고 현장을 발로 뛰는 평검사와 강력계 형사, 심지어 지나치게 정치적인 되어버린 국과수를 나와 현장으로 뛰어든 법의학자의 목숨을 건 사건 추격이 이어지지만, 이 상황에서 정치권은 사건의 해결을 도와주기보다는 오히려 은폐하기 바쁘다. 드라마 시작과 함께 명시되는 '이 드라마는 특정 기관과 관련이 없다'는 문구는 거꾸로 이 드라마가 그저 드라마에 머물지 않는다는 얘기를 해주는 것만 같다. 국가가 정의를 세워주지 않는 상황에서 판타지로서의 영웅들이 탄생한다. 세상은 좁고, 비정하고 사건은 우리 주변에서 벌어질 만큼 넘쳐난다.

'싸인'의 숨 막히는 스릴러는 물론 능숙한 장르 운용의 힘이다. 하지만 장르라는 건 콘텐츠 내에서 뚝딱 만들어지는 그런 게 아니다. 장르는 당대 현실과 작품과의 조우에서 합의되는 것이다. 물론 현실과 거리가 있는 드라마적 극적 구성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싸인'은 바로 그 현실과의 접점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다. 세상은 '싸인'이 보여주는 것처럼 심지어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지만, 그 정의를 세워야할 기관들은 모두 정치적인 입장만을 반복하며 이를 외면한다. 국과수를 지키기 위해 국과수 밖으로 나오는 아이러니한 영웅의 탄생은 이처럼 현실에 깔려있는 어두운 공기들을 포착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