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해체의 시대, 당신의 선택은?
'나는 가수다'(사진출처:MBC)
이승기는 가수일까 연기자일까 아니면 예능인일까. 최근 새 앨범을 낸 김종민은 가수일까 예능인일까. UV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유세윤은 개그맨일까 가수일까. TV 예능 프로그램을 장악하고 있는 아이돌들은? '제국의 아이들'의 광희는 아이돌 가수가 맞을까. 과연 노래 못하는 가수를 가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왜 '1박2일'에서 강호동과 이수근은 그토록 "우린 코미디언 아이가!"하고 외치는 걸까.
사실상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연예인들은 한 가지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점점 확장해나가고 있지만, 이런 변화 속에서 정체성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연예인 당사자들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걸 바라보고 있는 대중의 혼동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유난히 정체성에 집착하는 '나는 □다' 식의 제목과 그 패러디들이 눈에 띈다.
그 촉발점은 아마도 '나는 가수다'였을 것이다. 사실 누구나 느끼고 있지만 속으로만 생각해왔던 가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이 예능 프로그램은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그동안 각종 뮤직차트 프로그램을 가득 메웠던 아이돌가수들만을 봐왔던 시청자들에게, 놀라운 가창력과 최고의 무대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노력을 통해 그 진정성을 보여준 '나는 가수다'의 가수들은 대중들에게 새삼 가수란 존재의 다른 실체를 보여주었다.
'나는 가수다'가 던진 가수의 최고 덕목으로서의 가창력에 대한 질문은 거꾸로 가창력 없는 가수들에 대한 역질문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너는 가수냐"하고 질문이 되돌아온 것이다. 많은 아이돌 그룹에서 활동하는 아이돌들은 겨우 몇 초 노래를 하고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과도하게 노출되는 것으로 그 정체성을 의심받게 되었다. 뒤늦게 가창력의 잣대로 다시 들여다보니 과연 가수가 맞나 하는 의구심을 대중들이 갖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수의 정체성을 가창력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가수는 가창력 이외에도 작곡능력이나 창조적인 퍼포먼스, 아니면 메시지 그 자체만으로도 가수라는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즉 '나는 가수다'는 가창력을 가진 가수들의 정체성을 보여줬던 것뿐이지 모든 가수의 정체성을 그 예능 프로그램이 대변한 것은 아니다. 결국 '나는 가수다' 역시 음악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의 예능 프로그램이 아닌가. 지금 달라지고 있는 방송 환경 속에서 가수의 정체성은 좀 더 다양한 스펙트럼을 포괄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것은 가수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1박2일'에서 "우린 코미디언 아이가"하고 강호동과 이수근이 외치는 건 거꾸로 말하면 점점 좁아지고 있는 코미디언들의 입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미 리얼화되어버린 예능 프로그램은 이제 코미디언보다는 예능이 낯선 가수나 배우를 더 선호한다. 엄태웅이 '1박2일'의 순둥이가 된 것도, 양준혁이 '남자의 자격'의 새 멤버가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니 개그맨들 역시 이제 타 분야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달인'팀의 류담은 '선덕여왕'에 이어 '로열패밀리'에서 연기를 하고 있고, 개그맨 정성화는 뮤지컬 배우로 스타덤에 오른 후 영화 '위험한 상견례'에서 미친 존재감을 보이고 있으며, 유세윤은 'UV 신드롬'으로 말 그대로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흥미로운 건 이러한 정체성 혼돈의 시대를 가까스로 붙잡으려는 몸부림처럼, '나는 □다'라는 제목과 패러디가 넘쳐난다는 점이다. tvN에서 '오페라스타'가 방영되자 '나는 오페라스타다'라는 문구가 등장했고, 오랜만에 '로열패밀리'에서 미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는 염정아에 대해 '나는 배우 염정아다'라는 찬사가 이어졌다. 가창력을 지닌 솔로가수들에 대한 주목에 대해 '나는 솔로가수다'라는 지칭이 등장했고, 심지어 '나는 아빠다'라는 영화는 굳이 그렇게 제목을 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데도 '아빠의 정체성'을 볼모로 삼았다. 그러자 네티즌들은 비판적인 시선을 담아 '나는 관객이다'라는 댓글로 응수하기도 했다.
지금은 바야흐로 모든 경계들이 허물어지는 시대다. 과거에 가진 정체성은 이 변화 속에서 흔들리고 있고 새로운 정체성의 정립을 요구하고 있다. 혹자는 이 변화를 탐탁찮게 여긴다. 본질이 흐려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근본적인 것까지 변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과거의 정체성만을 주장하는 것도 자칫 공허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이 혼돈의 시기에 그 경계 위에 선 이들은 스스로도 이제 자문해봐야 한다. 나의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고.
'옛글들 > 네모난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태지 루머와 'UV 신드롬 비긴즈' (1) | 2011.05.06 |
---|---|
무엇이 아나운서를 춤추게 하나 (0) | 2011.05.04 |
현빈, 어쩌다 군 생활까지 생중계하게 됐나 (2) | 2011.04.19 |
'MBC 스페셜', 가난할수록 행복해지는 이유 (2) | 2011.03.05 |
코멘테이터의 시대, 해설이 예능보다 재밌다 (1) | 2011.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