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식 블록버스터, ‘황후화’의 아쉬움
장예모라는 이름에서 아직까지도 ‘붉은 수수밭’, ‘국두’, ‘홍등’, ‘귀주이야기’ 등을 떠올리는 분들이라면 그의 최신작 ‘황후화’는 좀 당혹스러운 영화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리라는 배우가 똑같이 등장하지만 그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다. 먼저 제작비 450억 원이란 수치가 그렇다. 아무리 ‘영웅’, ‘연인’의 전작을 통해 이 거장의 행보가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고는 해도, 이 정도까지 블록버스터의 면모를 과시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화려한 장식이 깃든 복식들과 궁궐의 모습에서부터 단박에 시선을 잡아끈 영상의 색채와 스케일은, 천 여명에 이르는 대대적인 엑스트라들이 동원되어 마치 사람의 물결이 넘실대는 듯한 전투신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중국식 인해전술’이란 생각이 퍼뜩 드는 그 지점부터 장예모 같은 거장이 왜 이런 전술을 쓰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든다.
영화는 무언가를 알리는 다급한 ‘딱딱이(?)’ 소리와 함께 일어나 도열해 옷을 차려입는 수백 명의 궁녀들에서부터 시작한다. 화면의 색채는 붉은 빛이 감도는 노란 황금빛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 틈입하는 인서어트에서 일단의 군대가 말을 타고 달려가는 장면이 끼어든다. 그 화면의 색채는 푸른 빛이 돌면서 저 황금빛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다시 화면이 바뀌면 황금장식을 하는 황후(공리 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이 황금빛 장면은 다시 푸른 빛의 군대 장면과 교차된다. 이 집약된 장면들은 장차 황제(주윤발 분)의 군대와 황후의 군대 사이에서 벌어질 색채의 전쟁을 예감케 한다. 그리고 미로처럼 폐쇄된 궁궐을, 굳은 얼굴로 다급하게 걸어가는 황후의 장면이 이어지면서 캐릭터의 내적 갈등과 공간이 묘한 조화를 만들어낸다. 장예모가 아니면 쉽지 않았을 이 작다면 작은 가족의 치정사가 궁궐이라는 거대한 몸체와 합체되는 순간이다.
영화의 내용은 복잡해도 그것은 한 가족의 틀을 넘어서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거대한 이야기의 메인 스토리를 엮어가는 인물이 황제, 황후, 세 왕자, 황실 주치의와 그 아내 이렇게 총 일곱 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관계가 복잡해 보이는 건 세 왕자 중 첫째가 배가 다른 소생이며 이 왕자가 황후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야기는 황제와 황후 사이의 대립에서 비롯되어 불게되는 궁궐 내의 피 바람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거대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들 몇몇 인물의 권력투쟁이 수천 명의 피를 부르는 구조에 있다. “그저 화려했던 과거 중국 봉건문화가 얼마나 허위적인지를 알리고 싶었다”는 장예모 감독의 말을 빌린다면 이 거대한 치정극이 보여주는 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만큼 강한 설득력을 얻는다. 이 영화는 수천 명의 군대가 궁이라는 밀폐된 공간 속에서(평원이나 성이 아니다) 황제와 황후의 명령 하나로 전쟁을 벌이는 영화다. 그만큼 비현실적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스케일이 풍자와 비판의 선을 넘어선다. 사실 의도가 그 허위 고발에 있었다면 조금은 관객들이 그 거대한 장면 속으로 빠져들지 않고 생각하게 만들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심지어 현실을 꼬집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주었어야 했다. 그렇지만 엄청난 스케일의 화려함 속에서 비판의 칼날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쿠데타군과 진압군이 궁 안에서 벌이는 전투신에 가서는 색채와 색채의 부딪침 같은 영상미학이 느껴질 정도이다. 아름다운 피 바람이 화면 가득 채워지는 순간, 영화는 블록버스터를 향해 달려간다. 중국 내에서 민감하기 이를 데 없는 권위적인 가장이 만들어내는 비극적인 가족 코드를 가지고 관객들을 끌어 모은 영화는 블록버스터의 거대함 속에 비판의식을 매몰시킨다. 그리고 놀랍게도 결국 황제의 권위에 의해 모든 것이 진압되는 상황을 연출하며, 영화를 통해 현실의 모반을 꿈꾸던 관객들에게 오히려 경고의 메시지를 날린다.
영화가 갑자기 과잉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 애초의 목적이 흐려지는 이 마지막 순간에서이다. 그러자 인해전술의 목적은 메시지의 전달을 위한 것이 아닌 좀더 상업적인 목적에 가까워진다. 즉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 모으기 위한(극장에서 봐야 진짜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스케일) ‘헐리우드 블록버스트를 의식한 중국식 블록버스트’라는 마케팅적인 접근이 보이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집단 매스게임을 보는 듯한 스펙터클 속에서 2008 베이징올림픽 총감독직을 맡은 장예모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일까.
그러나 역시 거장은 거장이다. 본인 스스로 “외국영화에 잠식되는 중국시장을 위해서라도 상업적인 목적으로 영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래서 거기에 딱 걸맞는 거대한 스케일의 영화를 만들어냈지만, 그 속에서 자신만의 색채 미학, 영상 미학을 담아 넣는 건 거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단순한 치정극의 틀을 저 만다라의 무늬를 연상케 하는 테이블에 앉힘으로서 무한한 의미의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면모 역시 대단하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장예모의 스케일 작은 영화들이 보여준 커다란 영화(?)세계가 아쉬운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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