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뿌리', 그들은 왜 잠 못 드는가 본문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뿌리', 그들은 왜 잠 못 드는가

D.H.Jung 2011. 11. 16. 08:58
728x90


'뿌리', 팩션의 진가를 드러내다

'뿌리깊은 나무'(사진출처:SBS)

그들은 잠들지 못한다. 3경5점. 지금으로 치면 자정을 넘긴 시각에 그들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누군가를 쫓기 위해 또 누군가를 걱정하고 도움을 주기 위해 잠을 자지 못한다. '뿌리 깊은 나무'의 인물들은 잠들지 못해 망가져가는 몸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다. 잠드는 것이, 그래서 악몽 같은 과거의 그 한 순간이 꿈 자락에라도 슬쩍 찾아드는 것이 더 큰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잠들지 못하는 건 과거 그들에게 있었던 사건이 남긴 트라우마 때문이다.

똘복 강채윤(장혁)은 기구하게 죽음을 맞게 된 아비에 대한 복수 때문에 잠 못 이룬다. 태종 이방원(백윤식) 때의 사건이지만 그는 그 자식인 세종 이도(한석규)에게 그 원한을 풀려 한다. 소이(신세경)는 자신의 말 한 마디 때문에 똘복의 아비가 죽게 되었다는 사실에 잠 못 이룬다. 충격으로 스스로 말문을 막아버린 그녀는 똘복에게 사죄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글을 몰라서 벌어진 그 사건 때문에 세종이 하고 있는 한글 창제에 헌신한다.

한편 세종이 잠 못 드는 건 이 두 사람 때문이다. 아버지 태종 밑에서 뭐 하나 할 수 없는 무기력함에 빠져 있을 때, 자신이 처음으로 살린 백성 똘복을 위해, 또 자신 때문에 말을 못하게 된 소이의 입을 트이게 하기 위해 그는 잠을 자지 않고 한글 창제에 온몸을 던진다. 심지어 유학자로서는 할 수 없는 시신 해부까지 하는 그는 그만큼 필사적이다. 자신 때문에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벙어리가 되는 상황을 더 이상은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뿌리 깊은 나무'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같은 거대한 업적을 다루면서도 남 일이 아닌 내 일 같은 사적인 사건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잃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 사극은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는 그 동기를 그저 막연히 '백성을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세종 이도에게 확고한 동기부여를 하고 있는 똘복과 소이라는 두 캐릭터를 세워둠으로써 극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게 된다.

물론 이 가상의 두 인물, 똘복과 소이는 이 사극에서 백성을 표상하는 캐릭터들이다. 똘복은 세종이 처음으로 살린 백성이고 또한 세종이 한글의 최종검수를 맡길 인물이다. 즉 세종은 백성을 위한 자신의 이 행위를 통해 똘복의 원망이 소통으로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극은 궁극적으로 말하면 세종의 한글 창제를 통해 똘복으로 대변되는 백성과의 소통을 이루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소이는 말을 못하게 되었다는 그 설정만으로도 문맹인 백성을 구체적으로 지칭하는 인물이고, 따라서 한글 창제에 있어서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녀가 말을 하게 되는 순간은 아마도 한글이 반포되어 백성들의 말문이 열리는 그 때가 될 것이다.

한글 창제라는 역사 속의 글들이 눈앞에 꿈틀대며 살아 움직이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캐릭터들로 인해 구체화된 의미 덕분이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들의 욕망과 소망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은 그 자체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그것은 이 사극의 내적인 동력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주제가 된다. '뿌리 깊은 나무'라는 조금은 복잡한 이야기가 흥미진진한 극의 구조를 잘 따라가면서도 지리멸렬해지지 않는 건, 캐릭터에 녹아있는 주제의식 덕분이다. 세종의 한글창제 이야기가 이토록 가슴을 치게 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우리가 이렇게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이 글 속에 담긴 절절한 마음이라니.

팩트(역사)에 픽션(이야기)이 붙여져 만들어진 팩션은 그저 재미를 위한 설정만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를 다시 불러들여 작금의 대중들에게 어떤 해석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똘복과 소이라는 가상인물은 그저 재미로 세워진 인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백성을 표상하는 인물들이고, 세종의 동기를 좀 더 확연히 들여다보게 만들어주는 인물들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그런 점에서 팩션의 진가를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