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천일', 고장 나고 있는 삶의 통찰

728x90


'천일', "나는 고장 나고 있어"

'천일의 약속'(사진출처:SBS)

두 여자가 운다. 한 여자는 갑자기 생긴 존재의 허기를 채우겠다는 듯, 한 바구니 사온 꽈배기, 도넛을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 넣으며 울고, 한 여자는 무언가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모두 뱉어내겠다는 듯이 끊임없이 토해내며 눈물을 흘린다. 한 여자는 채우면서 울고 한 여자는 비우면서 운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눈물 흘리게 하는 걸까. 드라마 '천일의 약속'이 그려내는 기막힌 풍경이다.

존재의 허기를 느끼는 여자는 이서연(수애)이다. 그녀는 알츠하이머다. 그녀의 사라져가는 기억은 점점 자신의 삶을 갉아먹는다. 그녀는 그 떠나가는 기억을 부여잡으려 작가들 이름을 줄줄이 외우고 수첩에 빼곡하게 기억해야 할 것들을 적어 넣는다. 그런 그녀지만 떠나 보내야할 기억도 있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 박지형(김래원)이다. "당신의 삶까지 삼켜버릴 수는 없어." 그녀의 사라져가는 기억이 그의 삶마저 삼켜버리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속에 있는 것들을 모두 빼내려는 듯 토하고 또 토하는 여자는 노향기(정유미)다. 그녀는 아무런 삶의 질곡 없이 말끔한 인생을 살아왔다. 그 인생 위에 오롯이 박지형이라는 남자만을 주름으로 채워 넣은 채. 그녀의 삶의 기억은 온통 그 남자다. 그런데 그가 떠나려고 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뭐든 해주는 것이 그녀가 하는 사랑의 방식인지라, 그녀는 그를 보내주려 한다. 그래서 자신 속에 선명히 남아있는 기억마저 토해내려 한다. 그럴수록 더 깊어지는 것이 기억의 주름이 남긴 상처일 것이지만.

'천일의 약속'은 두 여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네 삶에서 기억이 가진 이중성을 드러내는 드라마다. 우리는 기억하고 싶은 만큼 잊고 싶은 존재다. 기억은 달콤한 삶의 추억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독한 고통의 악몽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똑같은 사랑의 기억이라고 하더라도. 하지만 기억이란 놈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사라져가는 기억이나 잊혀지지 않는 기억, 그 무엇도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누구나 다 잊게 되고 누구나 다 잊지 못하게 된다.

상투적으로 들리겠지만 삶의 기억으로 남는 것은 결국 '사랑'이다. 그래서 '천일의 약속'은 그 상투적일 수 있는 사랑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사랑을 표피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삶의 잣대로 바라본다는 것이 큰 차이다. 삶이 결국 하나의 짧은 기억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 기억을 누구와 함께 나누고 누구의 기억으로 채우며 누구의 기억 속에 남게 되는가는 실로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결혼식을 이틀 앞두고 갑자기 파혼선언을 해버리는 남자 박지형을 이해할 수가 있다. 박지형의 선택은 결혼식이라는 그 짧은 순간을 염두에 두고 바라보면 양가 가족들이 입을 모아 말하듯 '미친 짓'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인생 전체를 두고 바라본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자신의 삶의 기억일 수 있는 여자의 마지막 기억 속에 남고 싶고, 그녀의 마지막을 자신의 기억 속에 남기고 싶은 그 삶의 욕망.

'천일의 약속'은 제목처럼 시간(천일)과 기억(약속)에 관한 김수현 작가의 진중한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와 함께 피자를 먹고, 콜라를 마시고, 트림을 하며 밀어를 나누던 이서연의 그 일상적인 기억들은 지극히 소소한 것들이지만, 그녀의 기억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현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아련하고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한 장면으로 그려진다. 그녀의 직업이 책을 만드는 출판이라는 사실은 이 지극히 한 개인의 이야기를 우리네 삶의 이야기로 확장시킨다. 그 기억을 잡고 싶고 남기고 싶은 욕망. 책이라는 인간의 욕구.

"나는 고장 나고 있어."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이미 '고장 난' 것도 아니고. 아직 멀쩡하지만 '고장 날' 것도 아닌, 현재 '고장 나고' 있는 상황. 이 한 줄의 대사는 우리네 삶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서연은 알츠하이머라는 특수한 상황을 통해 기억의 관점에서 이 '고장 나고' 있는 인생을 깨달았던 것뿐이다. 사실 그 누구도 '고장 나고' 있지 않은 인생은 없지 않은가. '천일의 약속'이 보여주려는 건 바로 그 '고장 나고' 있는 우리네 삶의 운명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삶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기억을, 추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