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웃거나 분노하거나
요즘 시청자들의 욕구는 두 가지인 것 같다. 그것은 ‘웃고싶거나, 분노하고싶다는 것’. 멜로드라마의 퇴조는 바로 그 정조가 지금의 세태와 잘 맞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완성도를 떠나서 그 주인공이 질질 짜는 영상 자체에 시청자들은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실제 현실에서 ‘눈물의 가치’가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평가절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쿨(Cool)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눈물은 혼자 숨겨야할 어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TV 속에서 ‘눈물 흘리는 자’보다는 ‘힘겨워도 웃고 있는 자’를 더 리얼하게 생각한다.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각박해져만 가는 현실 속에서 매달 은행이자에 생활비에 아이들 학원비에 시달리고, 회사에서 구조조정의 칼날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오로지 입시를 위해 공부기계처럼 살아가고, 그렇게 들어간 대학에서조차 취업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멜로드라마가 보여주는 ‘사랑의 좌절로 인한 눈물’은 그다지 리얼한 공감을 일으키기가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차라리 이런 눈물보다는 ‘잠깐 동안의 도피’를 꿈꾼다. 케쎄라 쎄라. 눈물은 내일로 미루고 당장은 웃고 싶은 것이다.
웃고싶다, 생각하지 않고
공개개그 프로그램의 전성시대는 바로 이런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공개개그가 지향하는 호흡이 그다지 길지 않은 몇 분, 몇 초라는 것은, ‘잠시 생각은 접어두고 웃고싶은’ 시청자들의 입맛에 잘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이 촌천살인의 개그 속에는 현실에서 억압된 감정을 순간적으로 터뜨리는 폭발력이 있다. 마빡이의 단순한 동작 속에는 복잡한 현실을 무화시키는 강력한 웃음폭탄이 내재되어 있고, 죄민수의 막가파식 개그 속에는 사회와 권위의 억압을 해체하는 묘한 힘이 있다.
한편 이 마빡이나 죄민수 같은 소외되고 비천한 인물들은, 웃음을 찾는 시청자들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시키기에 딱 알맞은 캐릭터들이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무한도전’의 힘은 바로 그런 캐릭터들에서 나온다. ‘리얼 버라이어티 개그’를 지향하고 있지만 ‘무한도전’이 주는 웃음의 원천은 연출되지 않은 리얼한 상황에 있다기보다는, 그 상황 속에 있는 캐릭터들의 힘에 있다. 소심하고 비굴하면서도 정이 가는 유재석, 호통을 치지만 어딘지 연민이 느껴지는 박명수, 쉴 새없이 떠들어대지만 순수함이 느껴지는 노홍철, 덩치만 큰 곰 같은 우직함의 정준하, 장난기 많은 막내 같은 하하, 방송에 적응 못한 듯해 연민을 일으키는 정형돈. 이 소외된 캐릭터들이 엮어 가는 실제상황이라서 공감이 가는 것이다.
분노하고 싶다, 거침없이
하지만 이 웃음은 그냥 웃음이 아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란 말이다. 개그의 두 가지 웃음 촉발인자는 이제 ‘굴욕과 풍자’가 되었다. 굴욕이 자신을 한없이 무너뜨리는 데서 웃음을 만든다면, 풍자는 상대방을 조롱하고 깎아 내리는 데서 웃음을 촉발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나타난 양태가 다를 뿐, 그 근본 유발인자는 한 가지에서 나온다. 바로 ‘분노’이다. 굴욕이 타인이 아닌 내 자신에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자학)이라면, 풍자는 바로 그 타인에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 분노를 마빡이는 자기 자신에게, 죄민수는 타인에게 터트리는 형태로 웃음을 유발시킨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풍자가 개그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요인이다. ‘형님뉴스’는 “∼가 ∼다워야 ∼지’하는 유행어를 흩뿌리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가 ∼답지 않은” 세태를 꼬집는 말이다. 죄민수의 “아무 이유 없어!”, “이 MC계의 쓰레기!”같은 말 역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권위에 대한 조롱이 아닐 수 없다. 우아한 자태의 사모님이 하는 일련의 ‘무뇌형 발언’은 ‘돈은 많으나 생각은 없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제로’의 졸부들을 비꼬는 말들이다. 웃음 속에는 이다지도 많은 분노의 칼날들이 숨어 있다. 그 칼이 정확히 시청자들의 가슴에 꽂히는 순간, 카타르시스와 함께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TV, 웃거나 분노하거나
이것은 단지 개그 프로그램의 얘기만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멜로드라마가 어려운 것은 바로 눈물이 이 사회에서 리얼한 해결방식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이제 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웃음과 분노’가 하나의 쿨한 해결방식으로 자리잡는다. 그래서 멜로드라마가 손잡은 것은 코미디다. 따라서 작년에 코믹한 설정으로 호평을 얻었던 ‘돌아와요 순애씨’의 연장선 위에 ‘달자의 봄’이 있는 것이고, ‘환상의 커플’에 대한 열렬한 애정이 여전한 것이다. 일일드라마에 도전장을 내민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성공은 바로 이 웃음 코드를 공감 가고 리얼한 캐릭터들을 통해 잘 살린 데 있다. 눈물에 각박해진 시대에 드라마들은 웃어야 성공한다. 늘 웃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질질 짜지는 않아야 된다.
반면, 분노를 부추기는 드라마, 혹은 프로그램들이 TV의 또 한 축을 차지한다. 자극과 선정성을 무기로 들고 나오는 ‘논란드라마들’은 그 가장 강력한 무기로 ‘분노’를 사용한다. 폭력에 가까운 말들과 장면들이 오가는 화면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일종의 전이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 같다. 또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지나치게 자극적인 장면들을 포착하는 사회고발프로그램들의 영상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해결이 가진 문제점은 중독이다. 자극을 통한 문제의 해결은 더 큰 자극을 필요로 한다.
살기 어려운 시기에 웃음이 그 어려움을 위무해주는 코드로 나타난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자칫 분노로 일관되는 감정의 형태를 웃음이라는 긍정적인 형태로 변환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점점 떨어져만 가는 ‘눈물의 가치’이다. 삶에 있어서 웃음만큼 중요한 것이 ‘건강한 눈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단순한 최루성이나 구태의연한 설정으로 유발되는 눈물이 아닌, 이 시대의 감성코드와 공감할 수 있는 눈물이 어느 때보다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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