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과의사 봉달희’에서 최고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배우, 이범수. 그는 극중 배역인 안중근의 캐릭터 때문에 ‘버럭범수’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입만 열었다 하면 ‘버럭’ 화난 듯한 말투 때문이지만 바로 그 점이 그의 매력포인트. 한치의 긴장감도 늦출 수 없는 의사라는 직업 속에서 그의 ‘버럭’은 결국 환자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될만한 구석이 있다.
그래서일까. 늘 굳어있을 수밖에 없는 그의 얼굴에서 잠깐 동안의 미소를 보는 것은 시청자들에게는 하나의 축복이다. 그런 그가 사랑에 빠졌다. 그것도 의사로서 어리숙하기 이를 데 없어 처음 보자마자 “넌 의사할 생각도 하지마”라고 말해버렸던 봉달희(이요원 분)에게. 그러니 요즘 드라마에서 아무리 멜로가 죄라지만, ‘외과의사 봉달희’를 보는 재미에 버럭범수의 사랑법을 뺄 수 있을까.
버럭범수 사랑법의 핵심은 ‘어색하다’는 것.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괜시리 늘 하던 대로 버럭대다가, 가고 나면 후회하는 그 미숙함이 오히려 순수하온다. 그는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한 듯 하다. 그가 봉달희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남들처럼 연애감정에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봉달희의 환자들에 대한 열정을 그가 목격하면서부터이다. 어쩌면 버럭범수는 그 모습에서 자신처럼 상처 입은, 그래서 의사가 되어야만 했던 또 다른 자신을 보았는 지도 모른다. 자기가 가장 잘 아는 의사라는 직업 속에서야 겨우 사랑을 찾을 정도니 그의 사랑법이 어색할밖에.
그래서 사랑에 어색한 그는 수동적이다. 그가 봉달희에게 하는 것은 고작, 멀리서 쳐다보거나, 환자의 처치법을 가르쳐주거나, 화를 안내거나, 그녀를 건드는 사람에게 버럭하는 정도다. 응급실로 실려온 살인용의자에게 봉변을 당할 뻔한 봉달희에게 기껏 하는 말이, “괜찮아? 됐어 그럼.”이다. 이건 겉으로 봐서 누가 봐도 사랑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극단적인 수동. 하지만 극은 극으로 통한다고 그의 마음을 미리 읽고 있는 시청자들에게는 100% 반대의 묘미를 선사한다. 표현 못하는 그의 모습에 미소가 나오다가도 그의 숨겨진 아픔이나 심연 같은 것을 문득 엿보기도 하는 것이다.
버럭범수의 사랑법이 눈에 띄는 또 다른 이유는 삼각관계의 한 축이 되고 있는 이건욱(김민준 분)의 사랑법이 그와 너무나 대조를 이루기 때문. 이건욱의 사랑법은 안중근과는 정반대로 ‘매우 세련’되어 있다. 부드러운 듯 보이지만 적극적이고, 아프면 아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그 마음을 표현한다. 게다가 상대방을 배려하는 인내의 미학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이보다 완벽할 수 있을까.
이 능동적인 이건욱과 수동적인 안중근의 사랑법만 보아도 우리는 어느 쪽이 더 강하고 약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겉보기에 부드러워 보이는 이건욱은 사실은 굉장히 하드보일드한 캐릭터다. 그는 타인이라면 견뎌내기 힘들 마음의 고통(7년 간 살아온 자신의 아들이 사실은 타인의 자식이었다는 것 같은)을 웃는 얼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다. 반면 버럭대기 일쑤라 강해 보이는 안중근은 사실 상처투성이로 약하기 이를 데 없는 캐릭터다. 우리의 마음이 완벽해 보이는 이건욱보다 안중근에게 자꾸만 가는 이유는 버럭 이면에서 언뜻 보이는 약한 모습의 안타까움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버럭범수의 봉달희 사랑법이 드라마적으로 공감을 주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의사라는 직업과 잘 매칭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의사들의 사무적인 모습은 사실 안중근과 많이 닮아있다. 그 현실의 딱딱함은 그러나 드라마 속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의사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생과 사가 오가는 병원에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늘 긴장을 늦추지 않는 의사로 살아온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딱딱한 모습으로 굳어진 의사의 얼굴 이면을 비추는 드라마 속에서 따뜻한 의사의 작은 표현에도 반하는 것이 아닐까. 버럭범수는 그 시청자들의 욕구가 제대로 투영된 캐릭터라고 보여진다.
버럭범수의 봉달희 사랑법은 ‘외과의사 봉달희’를 보는 또 다른 재미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욕구가 반영된 의사의 사랑법이란 점에서 병원드라마와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멜로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완전히 사랑에만 빠진 의사를 보는 것도 싫고, 사랑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기계 같은 의사를 보는 것도 싫다. 관건은 의사로서의 긴장감이 차츰 무장해제되어가는 과정과 수위에 달려 있을 것이다. 전문직 드라마 속에서도 제대로 엮어진 멜로는 재미있다.
'옛글들 > 명랑TV'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침없이 캐릭터를 날리다 (1) | 2007.03.09 |
---|---|
왜 ‘하얀거탑’은 최도영을 버렸나 (0) | 2007.02.24 |
마빡이와 죄민수가 보여주는 쿨한 세태 (0) | 2007.01.29 |
‘하얀거탑’엔 없고 ‘∼봉달희’엔 있는 것 (0) | 2007.01.18 |
김명민-이정길-김창완, ‘하얀거탑’의 야누스들 (0) | 2007.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