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판타지보다 강한 <적도>의 현실
지난 3월21일 수목극은 동시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 첫 승자는 <더킹 투하츠>였다. 당연한 결과였다. 누가 봐도 <더킹 투하츠>가 가진 자원이 타 방송사의 두 드라마에 비해 월등했기 때문이다. 이승기와 하지원이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다는 사실과, <태릉선수촌>, <베토벤 바이러스> 등으로 이미 손발을 맞췄던 이재규 감독과 홍진아 작가가 연출과 대본을 맡았다는 점만으로도 이 작품의 신뢰감은 그 어느 것들보다 높을 수밖에 없었다.
'적도의 남자'(사진출처:KBS)
실제로도 <더킹 투하츠>는 연출, 대본, 연기 그 어느 것 하나 떨어지는 것이 없는 완성도 높은 작품인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문제는 소재가 낯설다는 것. 남북 간의 화합을 남녀 간의 문제로 풀어낸다는 점과 입헌군주제로서 왕이 존재한다는 가상설정은 잘 만들어진 작품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이 드라마를 실험적으로 만들었다.
이런 사정은 <옥탑방 왕세자>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 역시 조선의 왕세자가 현재로 넘어온다는 타임리프 설정의 참신함과 그 시간적 간극이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개콘>보다 재밌는 코미디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왕세자와 그 신하들(?)이 현재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코미디적 요소가 조금씩 빠지고, 본격적으로 드라마적 요소들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아쉽게도 전형적인 재벌집 아들과 신데렐라 이야기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킹 투하츠>나 <옥탑방 왕세자>는 모두 높은 완성도를 지닌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대중적인 측면만을 높고 <적도의 남자>가 맨 꼴찌에서 시작해 두 왕(?)을 물리치고 맨 꼭대기에 서게 된 이유를 찾아보면 무엇을 다뤘는가 하는 소재적인 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더킹 투하츠>나 <옥탑방 왕세자>는 그 접근방식이 다를 뿐, 왕(자)과 신데렐라에 대한 판타지의 변형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더킹 투하츠>는 남한의 왕 재하(이승기)와 북한의 특수부대 교관(남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이에 벌어지는 멜로가 핵심적이다. 물론 이 안에 복잡한 남북 간의 정치적 상황들이 들어서지만 그 근간은 멜로임이 분명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남북문제를 전면에 세우는 건 더 낯설게 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옥탑방 왕세자>가 타임 리프라는 설정과 두 건의 살인사건을 갖고 있으면서도 결국은 이각(박유천)과 박하(한지민)의 멜로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와 같다.
하지만 <적도의 남자>는 결국 멜로로 귀결되는 두 작품과 비교해 좀 더 진지한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점을 가진다. 겉으로 보기에 <더킹 투하츠>나 <옥탑방 왕세자>가 어딘지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반면, <적도의 남자>가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건 그 사회적인 지점들이 좀더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적도의 남자>는 시각장애라는 설정을 통해 정의에 눈 먼 사회를 에둘러 보여주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그 안에 복수극과 멜로라는 익숙한 장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더킹 투하츠>가 왕가의 이야기를 다루고, <옥탑방 왕세자>가 재벌가 이야기로 회귀할 때 <적도의 남자>의 선우(엄태웅)는 눈이 먼 채 어두운 방에서 절규하고 있었다. 태생적으로 정해진 두 왕의 이야기와 달리, 이 적도 같은 불모의 바닥에 내쳐졌지만 굴복하지 않고 일어서는 선우의 이야기는 그만큼 대중들에게 작금의 현실을 떠올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적도의 남자>가 두 왕들을 물리친 비결은 바로 이 왕의 판타지보다 강할 수밖에 없었던 <적도의 남자>가 보여주는 지독한 현실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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