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딸'의 귀남과 '넝굴당'의 귀남
92년도에 방영되었던 '아들과 딸'에는 귀남(최수종)과 후남(김희애)이라는 이란성 쌍둥이가 등장한다. 제목과 극중 이름에서부터 짐작하겠지만, 이 드라마는 당시 남녀의 문제를 가족드라마의 틀에서 다루었다. 남아선호사상 속에서 귀남이는 집안에서 온갖 특혜(?)를 받고 후남이는 능력에도 불구하고 귀남이에게 많은 것을 양보해야 하는 상황. 하지만 이 드라마는 남녀를 대결구도로 보기보다는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해 부여되는 남자들의 부담과 짐 또한 다루었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사진출처:KBS)
그리고 20년이 지난 2012년, 귀남이가 다시 돌아왔다. 물론 이름은 귀남이지만 사고방식이나 행동이나 모든 게 달라졌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귀남(유준상)이 그 주인공이다. 이름만 들으면 귀하디 귀하게 자란 전형적인 구세대의 아들 같지만, 성이 방씨라는 것은 이 모든 예상을 농담으로 반전시킨다. 방귀남. 이 드라마 속에서 귀남은 어쩌면 여성들에게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귀한 남자', 넝쿨째 굴러온 복덩어리로 다가온다.
일하는 아내를 위해 아낌없는 외조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친정 부모를 친부모처럼 생각하는 그 진심어린 마음은 결혼한 여자들이라면 홀딱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게다. 특히 가장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는 제사 에피소드는 이 귀남이란 남자의 귀한 면모(?)를 뭇 여성들의 가슴에 확실히 각인시켜주었다. 일 때문에 제사 준비도 못하고 늦게 들어오는 아내를 대신해 팔 걷어 부치고 부엌에서 아내 몫까지 요리를 돕는 모습은, 남자들은 밤이나 까고 여자들은 온갖 요리를 해내야 하는 우리네 제사 풍경의 불합리를 통쾌하게 뒤집어 주었다.
이 20년 전 '아들과 딸'에 등장하는 귀남과 현재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 등장하는 귀남 사이의 변화는 그간 달라진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 물론 20년 전 '아들과 딸' 역시 그런 남아선호사상을 비판적 관점에서 바라봤지만, 그 분위기는 자못 무거웠다. 하지만 '넝쿨째 굴러온 당신'은 시집살이의 문제조차 발랄한 코미디로 풀어낸다. 하긴 이런 남편에 대한 판타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많이 달라졌다고 해도 여전한 시집살이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이 엉뚱한 행동으로 시집사람들을 뒤집어놓는 귀남의 행동은 확실히 남자들이 봐도 공감이 가는 구석이 있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 주말드라마로서 무려 35%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내고 있는 이유는 이 시집살이를 뒤집어놓는 귀남이라는 존재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서 귀남은 아내인 차윤희(김남주)에게 결혼에 있어서의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게 만드는 존재다. 차윤희는 시댁 식구가 하나도 없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귀남과 결혼했지만, 귀남이 잃어버린 가족(그것도 대가족이다)을 찾게 되면서 차윤희의 삶은 반전된다. 이웃으로 알던 처지에 마구 했던 행동들은 졸지에 시댁식구들로 관계가 바뀌면서 고스란히 그녀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또 반전이 일어난다. 바로 귀남에 의한 반전이다. 사사건건 차윤희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시누이 말숙(오연서)과 시댁식구들의 무차별 공격 속에서도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도와주는 남편 귀남이 있어 그녀는 버틸 수 있게 된다. 미국에 입양되어 살아온 전력은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귀남의 행동이 자연스럽게 전통적인 시댁의 사고방식과 부딪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 무조건적으로 핵가족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이 드라마는 시댁으로 대변되는 기존 가족관계가 가진 비합리성을 꼬집으면서도, 동시에 가족이 가진 가치를 버리지 않는다. 귀남은 가족이 있다는 것의 행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 따라서 이 전근대적인 가치와 현대의 가치는 귀남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서로 부딪치며 화해하게 된다. 따라서 '넝쿨째 굴러온 당신'은 귀남을 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귀남을 통해 새롭게 재해석되고 가치매김 되는 가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20년이 흐르면서 귀남은 이렇게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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