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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추적자> 명대사, 그 통감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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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자>, 그들의 대사에 담긴 인간관

 

<추적자>를 보다 보면 고통스럽지만 고개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공감을 접하게 된다. 이 시대 서민들의 아버지를 대변하는 백홍석(손현주)에 대한 깊은 연민과 동정을 갖게 되면서도, 그를 핍박하는 욕망과 권력의 화신들인 서회장(박근형)과 강동윤(김상중)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백홍석보다 훨씬 더 많은 서회장과 강동윤이 쏟아 낸 명대사로도 나타난다. 이 명대사들 속의 그 무엇이 우리를 통감하게 했을까.

 

'추적자"(사진출처:SBS)

“동윤아, 내가 민성이 만할 때, 명절 때마다 동네에서 소싸움을 했다 아이가. 거기서 내리 몇 년을 이긴 황소가 있었다. 글마 그게 어째 죽었는지 아나? 껄껄껄 모기한티 물리 죽었다. 지보다 두 배나 더 큰 놈들을 넙죽넙죽 넘기던 놈이 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모기한테 물려죽었다 아이가?”

 

강동윤이 대선에서의 승리를 장담하자 서회장이 던지는 이 대사에는 큰일을 그르치는 것이 아주 사소한 것에서 비롯된다는 내용이 비유적으로 담겨있다. 하지만 이 비유 밑에 깔려있는 건 세상을 ‘싸움’으로 바라보는 서회장의 시선이다. 강동윤의 대사처럼 그들에게는 “누군가 꿈을 이루면 누군가는 꿈을 잃는 법”이고, “큰 마차가 먼 길을 가다보면 깔려주는 벌레도 있기 마련”이다. 이 무한 경쟁 속에서 꿈을 잃지 않으려면 꿈을 반드시 이뤄야 하고, 벌레가 되지 않으려면 마차가 되어야 하는 권력욕이 탄생한다.

 

권력에 대한 강박은 세상이 승자독식의 구조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이 세상에서는 “용서도 힘 있는 사람만이 하는” 것이다. “힘이 없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포기뿐”이다. 모든 것이 권력에 맞춰져 있는 그들에게는 사랑마저 정치 같은 게임이다. “사랑은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임이야. 정치도 그래, 먼저 찾아가는 사람이 지는 거야. 상대방이 찾아오게 만들어야지.” 이렇게 말하는 강동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먼저 찾아갈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그들은 못할 것이 없는 괴물이 되어간다. “욕 안 먹고 어떻게 이 자리에 올라왔겠노, 지원아. 사람들이 내보고 손가락질 하고 한오그룹이 악덕그룹이라고 하제? 그른데 지 아들이 한오그룹 입사하면 사방으로 자랑하고 다닌다.” 그 괴물은 자신의 행동을 인간은 본래 그런 종자라고 단정함으로써 이 분열적인 상태를 버텨나간다. 자신이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세상이 괴물이라고 말하는 것.

 

“이 나라 국민들이 동윤이에게 속고 있다고 생각하나? 한오그룹 사위가 서민을 위해서 정치한다고 하는데 이 나라 국민들이 그걸 진짜 믿고 있다고 생각하나? 동윤이 공약을 한번 보래이. 집 가지고 있는 놈은 집값 올려준다 하지, 땅 있는 놈은 땅값 올리준다 카제, 월급쟁이한텐 봉급 올려준다 하제? 다 즈그들한테 이익이 되니까 지지하는 기다. 그런데 집값 올려준다고 해서 지지한다고 하면 지가 부끄러운 기라. 그래서 개혁의 기수다 뭐다 해서 지지하는 기다. 국민들은 자기가 자길 속이고 있는 거다.”

 

서회장의 이 대사 속에는 인간의 선한 의지에 대한 일말의 기대나 희망이 없다. 이것은 서회장이 자신을 똑 닮았다고 말하는 강동윤의 인간관과도 맞닿아있다. “사람이 그렇죠. 모두들 말은 그럴듯하게 합니다. 우리의 우정은 영원하다. 법과 정의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겠다... 하지만 선택의 순간이 되어서야 그 사람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30억이면 친구의 딸도 죽이고, 총리 자리 준다면 평생을 지켜 온 신념도 버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들을 하지요. 난 어쩔 수 없었다고.. 사람은 똑같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많은 것들이 쉬워지죠.” 일종의 인간에 대한 포기 선언이다.

 

하지만 그들 자신도 인간인 이상, 이러한 인간관이 분열적이고 공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막연하게나마 이 권력욕이 어느새 자신을 잡아먹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뜻이 사라져버린 욕망에 대한 무한 추구. 욕망의 욕망. 서회장은 젊은 시절 좋아했던 옆집 딸내미가 시집을 간 후 배운 술에 비유해 이 허무한 무한 욕망의 끝을 드러낸다. “두어 달 지나니 그 딸내미는 잊어버리고 술 먹는 버릇만 남은 거다. 지금은 그 딸내미 이름도 기억이 안 나고 술은 요새도 먹지 않나. 꿈이 그런 거다. 처음엔 페어한 세상을 만들겠다 뭐 하겠다 하면서 정치판에 끼어들지만 인제 너는.. 내가 잊어버린 그 딸내미 이름처럼 처음 하겠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권력을 갖겠다는 욕심만 남은기라.”

 

그들은 이미 욕망의 쟁취가 그 욕망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느새 욕망하는 기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서회장은 딸 지수에게 남편 강동윤을 버리지 못하자 이렇게 말한다. “지수야, 사람이 무엇인가를 간절히 가지고 싶을 때는 진짜로 그게 좋아서 그라는 게 아이다. 내 앞에 없으니까 만지고 싶고, 주머니에 넣고 싶고, 안 그러면 죽을 것 같고 하제? 근데 막상 가지면 별것도 아이다.”

 

권력욕의 화신이 자신을 잡아먹어버린 이 괴물들은 자신 속의 수많은 얼굴들을 가면 아래 감추고 살아간다. 그 얼굴의 실체를 보게 된 서회장의 막내 딸 지원(고준희)에게 강동윤은 자신의 수많은 얼굴을 드러내고 그것이 모든 인간들의 실체라고 주장한다. “난 다정한 형부, 개혁의 기수, 가난한 집의 아들, 아내의 사고를 숨겨서라도 권력을 가지고 싶던 정치인이다. 이게 전부 나다. 사람은 앞도 있고 옆도 있고 뒤도 있는데 처제는 내 한 부분만 본거다.” 하지만 이런 분열적인 상태는 심지어 아버지가 딸을 내치는 상황마저 정당화시킨다. “누가 그카드라 시상에서 제일 위험한기 사랑에 빠진 딸이라꼬. 그 누고 자명고 찢은 공주도 나라 망하게 안했나. 내한테는 오늘부터 딸래미는 지원이 하나뿐이데이.”

 

<추적자> 속에 등장하는 이 ‘인간 포기선언’의 명대사들은 아프게도 우리를 고개 끄덕이게 한다. “적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어느 영화 속 명대사가 허무한 다짐처럼 여겨지는 건 우리네 현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권력욕에 대한 비뚤어진 행동들이 이제는 마치 모든 인간들이 본래 그렇다는 식으로 긍정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지만 이렇게 포기된 인간으로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꿈을 꿀 수 있을까.

 

그래서 이 괴물이 된 그들이 내뱉는 명대사들의 깊은 통감을 지나치고 나면 우리 눈앞에 비로소 “난 수정이 아빠니까”라는 단 한 마디를 던지는 백홍석이 다시 보이게 될 것이다. 인간 포기 선언이 일상화되어가는 세상에 던지는 그의 이 한 마디는 그래서 그 어떤 명대사보다 더 뭉클하고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런 점에서 <추적자>는 그 잃어버린 ‘인간’을 추적하는 드라마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