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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닥터 진>의 선택, 역사인가 생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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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진>이 역사를 다루는 방식

 

“그러다가 이 사람에 의해 무고한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할 것이오. 그 억울한 죽음을 진의원이 책임질 수 있소?” 성난 민중들에 의해 깊은 상처를 입은 진주의 탐관오리 현감을 살리려는 진혁(송승헌)에게 영래(박민영)는 이렇게 묻는다. 하지만 “의원은 본디 사람을 가려가며 살리지 않는다”며 진혁은 진주 현감을 살려내고, 영래 역시 그를 도와준다. 하지만 바로 진혁이 살린 진주 현감이 영래의 오빠인 영휘(진이한)를 죽게 만든다.

 

'닥터 진'(사진출처:MBC)

그저 작은 시퀀스에 불과한 이야기 같지만 이 속에는 <닥터 진>이 역사를 다루는 방식이 담겨져 있다. 의사라면 마땅히 환자가 누구라도 일단 하나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본분일 것이다. 하지만 그 환자가 히틀러라면? 그래서 죽을 인물이 살아나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게 만든다면? 이것은 생명에 대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닥터 진>은 현대에서 조선으로 던져진 천재 신경외과의 진혁을 통해 운명(역사)과 생명 사이에 놓여진 딜레마를 다룬다.

 

“모든 것을 본래대로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장안 최고의 기생 춘홍(이소연)은 진혁이 조선으로 와 행한 기적 같은 의술이 모든 것(아마도 운명 혹은 역사)을 어그러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그가 안동김씨 최고의 실세로 임금보다 더한 권세를 누리고 있는 좌상 김병희(김응수)를 살린 일은, 역사에 기록될 대원군이 꿈을 펼치기도 전에 죽음의 위기로 몰리는 이유로 작용한다. 역시 죽을 뻔한 영휘를 살려놓은 일 또한 진주 민란을 더욱 조직적으로 만들게 하고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게 된다.

 

진혁은 그저 의사로서 눈앞에 상처입고 죽어가는 모든 이들을 환자로서 바라보았던 것뿐이지만,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역사는 뒤틀어지기 시작한다. 죽어야할 운명에 있는 이들이 살아나자 그들은 멀쩡해야 할 이들을 죽음에 몰아넣는다. 운명의 힘과 생명의 의지 사이에 벌어지는 대결. 이것은 단지 의사인 진혁에게만 해당되는 질문이 아니다. 결국 실패로 끝난 진주민란의 역사를 알고 있는 진혁이 그 민초들을 이끌고 있는 영휘에게 “이것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말하자, 영휘는 진혁이 해오던 말을 되돌려준다. “진의원은 병자가 죽을 것이 뻔하다고 손을 놓으시오? 그러니 내게도 저들을 모른 척 하라 하지 마시오.”

 

이미 역사를 알고 있는 진혁에게 진주민란 같은 사건의 결과는 운명처럼 정해진 일로 여겨진다. 그래서 불나방처럼 역사의 불꽃 속으로 뛰어드는 영휘를 막으려 한다. 하지만 진혁은 또한 알고 있다. 자신이 한 죽을 생명을 살려 운명을 바꾸게 될 때 역사도 엄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을. 여기에 진혁이 처한 딜레마가 있다. 그는 자신으로 인해 조선말의 역사가 다른 방향으로 틀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그래서 가까운 사람들이 죽지 않게 할 수 있으면서도), 그 역사를 바꾸는 것이 두렵다.

 

게다가 그는 의사가 아닌가. 의사라는 직업으로 돌아가면 그는 역사와 상관없이 모두를 환자로 바라보며 살려야 하는 것이 그의 본분이다. 그러니 이 지점에서 부딪침이 생길 수밖에 없다. 생명을 살리는 의사가 죽어야 할 인물을 살리면 그로 인해 역사가 바뀐다. <닥터 진>의 묘미는 바로 이 의학드라마와 사극을 타임리프라는 장치로 연결하면서 생겨나는 아이러니로 인해 진지해진다. 역사를 살릴 것인가, 생명을 살릴 것인가.

 

역사와 의술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 페스트 같은 질병 하나는 중세의 역사를 바꾸었다. 페니실린 같은 항생제의 개발은 지금까지의 역사를 바꿔놓고 있다. 아마도 우리가 역사적인 인물이라 생각하는 수많은 이들이 생명을 위협받는 질병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 때마다 어떤 의사의 손길 하나는 이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것이나 다름없다. <닥터 진>이 그저 단순한 타임리프를 소재로 흥미로운 장면들(예를 들면 조선시대에 뇌수술을 하는 것 같은)만 보여주는 드라마가 아니라는 건 이런 역사와 생명에 대한 인식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닥터 진>은 장르적으로도 사극과 의학드라마가 가진 욕망의 부딪침을 잘 살려내고 있다. 사극이란 본디 갈등의 결과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드라마다. 그래서 이 현대극보다 극성이 강한 장르는 어찌 보면 죽음이라는 칼날 위에서 춤을 추는 인물들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런데 의학드라마는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는 것이 그 욕망이다. 따라서 이 두 장르의 욕망이 부딪치면서 만들어내는 기묘한 풍경은 <닥터 진>만의 독특한 매력이기도 하다.

 

<닥터 진>은 사극인가 현대극인가. 이런 질문은 이제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닌 시대에 접어들었다. 사극이 반드시 역사의 틀 안에 머물던 과거는 이미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사극은 역사적 사실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이 그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닥터 진>은 그 어떤 사극보다 진지한 역사의식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와 생명의 의지 사이의 대결. 그저 박제처럼 정해져 있다 여겨졌던 역사가 사실은 무수한 생명들의 의지로 만들어지는 살아있는 결과물이라는 인식만으로도 <닥터 진>의 사극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