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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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중기 판타지는 어떻게 생겼나

D.H.Jung 2012. 11. 25.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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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중기, 세상 어디에도 없는 캐릭터 된 사연

 

<늑대소년>이 누적 관객수 52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 영화를 순수한 멜로영화라고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그렇다면 멜로영화 중에서는 최고의 관객수를 기록한 셈이다. 작품의 완성도가 대단한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대중들을 사로잡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늑대소년 철수라는 독특한 캐릭터와 그걸 연기해낸 송중기라는 아우라다.

 

자료: 영화 '늑대소년'

멜로라는 장르가 영화에서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해왔던 것처럼 드라마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그런데 드라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는 2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냈다. 여기서도 역시 그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강마루라는 캐릭터와 그걸 연기한 송중기다. 겉면으로는 스릴러와 판타지가 섞여있고 또 복수극의 요소들이 깃들여있지만 모두 그 알맹이를 보면 멜로의 결이 느껴지는 이 영화와 드라마의 성공, 그 안에 있는 늑대소년 철수와 강마루라는 캐릭터, 그리고 그걸 연기한 송중기. 과연 이건 우연의 일치일까.

 

거꾸로 뒤집어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송중기라는 배우가 가진 면모와, 지금 현재 대중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의 조합이 절묘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중성적 이미지의 외모와 남성성을 드러내는 내면을 가진 ‘세상 어디에도 없는(없을 것 같은)’ 판타지적인 존재다. 그렇다면 송중기라는 연기자와 늑대소년, 착한남자라는 캐릭터, 그리고 버겁디 버거운 현실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는 걸까.

 

<늑대소년>은 작금의 여성들이 갖고 있는 완벽한 판타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제목에서부터 드러난다. 늑대와 소년의 만남은 늑대로 표징되는 남성성과 미소년이 가진 중성적 이미지로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이 두 요소(남성성과 중성적 이미지)는 작금의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요구하는 양가적 이미지다. 사회적 분위기와 시대적 변화에 따라 급격히 초식화되어가고 있는 현재의 남성들에게 여성들은 거꾸로 ‘남성적인 면’을 판타지로 꿈꾸지만 그것이 중성적으로 포장되길 원한다.

 

이것은 이른바 ‘나쁜 남자 신드롬’과 맞닿아 있다. ‘나쁜 남자 신드롬’은 자신에게만 부드럽고(중성적) 타인들에게는 까칠한(남성적인) 그런 남자에 대한 판타지다. 흔히 드라마에서 ‘버럭’ 캐릭터로 등장하곤 하는 인물들이다. <외과의사 봉달희>의 안중근(이범수)이 그렇고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가 그러하며, <파스타>의 셰프 최현욱(이선균)이 그렇다. 이들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기 분야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지만 자기 여성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운 존재들이다.

 

<늑대소년>은 이 캐릭터의 극화버전인 셈이다. 철수라는 캐릭터는 아예 이러한 판타지가 가상의 존재로 축조된 인물이다. 철수는 순이(박보영)에 의해 순화되지만 인간이 아니다. 인간보다는 늑대에 더 가까운 존재. 그래서 남성성은 그 차원을 넘어 야수성으로까지 보여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이에 대한 부드러운 태도는 순정을 넘어 절대 복종으로 그려진다. 게다가 이 양가적 성격은 내면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이 캐릭터의 외형으로도 드러난다. 그들을 떼어놓으려는 이들 앞에서 그는 늑대로 변신하지만, 그녀 앞에서는 맑디맑은 미소년의 얼굴로 돌아온다. 미소년의 외모에 자신을 끝까지 기다려주고 보호해줄 것 같은 남성성의 결합체. 이런 완전체가 현실에 존재할 수 있을까.

 

‘세상 어디에도 없는’ 존재. <늑대소년>은 그래서 <착한남자>라는 드라마가 구축해낸 강마루라는 캐릭터와 만나게 된다. 강마루는 자신의 여자를 위해서 대신 감옥에 가기도 하고, 때론 죽음도 불사하는 그런 존재다. 제목은 <착한남자>지만 그 착함(사랑하는 여자를 위한)은 때론 파괴적인 양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래서 강마루 역시 <늑대소년>처럼 ‘세상 어디에도 없는’이라는 수식어를 갖게 된다.

 

물론 이 극대화된 판타지는 이런 남자가 현실에서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세상은 그렇게 착하지 않다. 특히 남자에게는. 특히 청춘에게는. 청춘의 남성들은 그런 현실 속에서 초식화되거나 타인과 담을 쌓고 자신에게 침잠하는 개인주의적 경향을 띌 수밖에 없다. 청춘을 등장시킬 수밖에 없는 멜로가 과거를 회상하고 추억하거나(<건축학개론>처럼), 극단적인 판타지로 숨는 것(<늑대소년>같은)은 그런 현실 때문일 게다.

 

아마도 이 이미지 때문일 게다. 이미지에 민감한 광고가 송중기를 가만둘 리 만무다. 그는 2개월간 총 10편의 광고를 제의 받았다고 한다. 물론 의도된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송중기가 갑자기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시대적 요청에 의해서다. 그는 곱상한 미소년의 얼굴에 강한 남성성의 내면을 숨기고 있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그런 캐릭터로 축조됐다. 그의 필모그래피가 말해주듯이 그는 미소년(<성균관스캔들> 같은)에서 시작해 갈등하고 고뇌하며 때론 분노하는 햄릿으로 왔다가(<뿌리 깊은 나무> 같은) 이 두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캐릭터로 세워졌다. 작금의 현실을 두고 볼 때, 이러한 캐릭터를 가진 송중기의 시대는 이미 도래한 것이나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