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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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과 대선, 서민들이 염원한 것

D.H.Jung 2012. 12. 21.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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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삶 속에서 인간다운 삶이란

 

대선이 끝났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당선으로 막을 내렸지만 그 어느 선거보다 뜨거웠던 대중들의 염원을 느낄 수 있었던 선거였다. 보수 진보와 신구세대로 나뉘어져 팽팽한 대결을 벌였지만 그 공약이 전하는 내용들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경제민주화로 양극화 문제 해결, 반값등록금 실현과 청년 실업 해결, 대기업의 횡포로 사라져버린 골목 상권 부활 등등. 그것이 보수 진보와 신구세대를 넘어선 작금의 민심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영화 <레미제라블>

대선이 치러진 날 <레미제라블>이 개봉되었다. 영진위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집계 결과 <레미제라블>은 이 날에만 전국 28만 3887명의 관객을 동원 누적 관객수 34만 3094명을 기록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다. 많은 유권자들이 투표를 마치고 이 영화를 봤을 것이다. 이미 고전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이 영화를 통해 대중들은 어떤 희망을 꿈꾸었을까.

 

<레미제라블>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후의 비참했던 민중들의 삶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제목부터가 <레 미제라블 Le Miserable> 즉 ‘비참한 사람들’ 혹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무려 19년의 감옥살이를 지낸 장발장, 병을 앓고 있는 코제트를 위해 몸까지 팔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한 불쌍한 여인 팡틴, 고아나 다름없이 갖은 구박과 착취를 겪으며 살아가는 코제트가 그들을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이 가난과 비참이 전염병처럼 돌고 있는 도시, 그 끝없는 고통의 그늘 속에서 마리우스 같은 혁명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기득권을 가진 아버지를 부정하고 이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진다. 하지만 혁명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거리 시위에서 모두 죽음을 맞이하고 결국 혼자만 장발장에 의해 살아남게 된 마리우스는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그 마리우스를 위로하고 감싸 안는 건 바로 연인 코제트와 그 사랑을 이뤄준 장발장이라는 위대한 인간의 헌신이다.

 

<레미제라블>은 최근 우리 문화계의 화두로 자리하고 있다. 뮤지컬 영화가 개봉되었고, 뮤지컬은 우리말로 초연되었다. 5권으로 완역된 소설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있고 심지어 다시 돌아온 피겨 여왕 김연아의 프리 프로그램의 새 레퍼토리가 바로 이 작품이다. 왜일까. 도대체 150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이 걸작이 지금 우리 시대와 맞닿은 지점은. 그것은 아마도 20세기, 자본이 그려낸 지구의 미래가 양극화라는 위기의식을 가져왔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게다.

 

돈이면 사람도 서슴없이 거래되는 이 비참한 시대에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가 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런 삶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희망이다. 도둑질을 한 장발장을 끌어안아 그 영혼을 구원한 미리엘 주교의 삶은 바로 그대로 장발장에 의해 반복된다. 한 사람에게 준 희망의 촛불이 다른 여러 사람의 희망을 비춰주는 빛이 되었던 것.

 

원작에서 장발장은 죽어가며 이런 말을 남긴다. “죽는 건 아무 것도 아니야. 무서운 건 진정으로 살지 못한 것이지.” 세상이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절망할 건 없다. 스스로 진정 인간다운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중요한 일이니까.

 

대선은 끝났고 당락은 결정됐다. 자신이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었든, 아니면 그렇지 못했든 그 과정에서 지금 이 땅의 대중들의 염원은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그 염원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게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는 일이다. 저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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