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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영화로 세상보기

'변호인'의 질문, 빨갱이는 여전히 유효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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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이 끄집어낸 30년 세월 무색한 색깔론

 

도시가 울긋불긋한 색으로 물들었던 크리스마스에 <변호인>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신드롬을 만들었다. 들뜨기 마련인 크리스마스지만 이처럼 진지한 영화에 관객들이 몰려들었다는 건 지금의 대중들에게 크리스마스보다 더 갈급한 정서가 있다는 걸 말해준다. 빨갱이라는 말로 붉은 색에 대한 심리적인 벽이 세워져 있던 시절에는 산타클로스의 붉은 색 옷마저 심지어 불온한 어떤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난 현재는 어떨까. ‘붉은 악마가 거리를 활보하는 시기를 거치기도 했지만 과연 이 색깔론의 트라우마는 극복된 것일까.

 

사진출처:영화 <변호인>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같은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지목되어 무단 감금, 고문을 당하던 시절이 있었다. 과거를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빨갱이라는 말은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게까지 느껴질 지도 모른다. 사람에 색깔을 덧붙여 특정 세력으로 지칭하는 것이 어찌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을까. 파랭이. 노랭이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색깔론은 분단 이후 우리네 사회에 끊임없이 등장하며 대중들의 판단을 흐트러뜨리는 괴물로 자리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심지어 2013년 현재까지도 그러하다. 무언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이들을 무조건 종북으로 몰아세우는 태도는 빨갱이라는 괴물을 또 다시 소환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변호인>에 대한 남다른 대중들의 열광은 이 지긋지긋한 색깔론에 대해 대중들이 얼마나 염증을 갖고 있는가를 말해준다.

 

<변호인>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먼저 거론되는 건 역시 그 주인공인 송우석(송강호)이라는 인물이다. 그가 바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델로 한 인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 자체가 사건보다 인물의 변화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부림사건(부산의 학림사건)’이 이 영화의 진짜 소재지만 <변호인>은 그 사건을 정공법으로 다루기 전에 우선 송우석이라는 속물 변호사가 어떻게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게 되는가 하는 그 과정에 더 집중한다.

 

그 과정에서 국밥집 아주머니인 순애(김영애)와 이 사건에 피해자가 된 그녀의 아들인 진우(임시완)가 소개되고 송우석은 사건을 맡기 전부터 이들과 가족 같은 유대관계를 맺는다. 이 부분은 이 영화가 단순히 사건의 재현에 머물지 않게 만든 중요한 성과로 보인다. 송우석은 정의감에 불타서가 아니라 자신이 조카처럼 생각하는 젊은이가 부당하게 고문을 당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에 인간적으로 분기하는 것이다. 정치적 사안들에 불감해진 대중들에게는 송우석의 지극히 인간적인 변화과정은(정치적인 선택이 아닌) 그래서 설득력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인물에서 잠시 시선을 거둬 사건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결국은 빨갱이 논란으로 귀결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송우석 변호사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제 에피소드이기도 한, E.H. 카가 소련의 빨갱이가 아니라 영국의 외교관이었다는 사실을 문서로 증명해낸다. 영국 측에서 보내온 서한에는 E.H. 카가 대단히 저명한 역사학자이고 그의 책이 더 많은 한국인들에게 읽히기를 바란다는 이야기까지 들어 있었다.

 

게다가 당시 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어느 대학에서나 사서 읽을 수 있던 책이었다. 송우석 변호사는 따라서 이 책이 버젓이 비치되어 있는 서울대를 나온 검사나 판사를 지목하며 당신네들의 학교는 그러면 빨갱이 학교라며 질타한다. 또 알리와 포먼이 경기할 때 김일성이 알리를 응원했다고 해서 피고인이 알리를 응원하면 이적행위냐고 일갈한다. 다소 논리가 우습게까지 여겨지지만 이런 실제 에피소드들을 영화화한 장면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것은 당시가 얼마나 비상식적이었는가다. 심지어 검사가 이에 대해 법정에서 김일성을 고무 찬양하는 행위를 삼가 달라고 말하는 대목은 그래서 실소마저 자아내게 만든다.

 

빨갱이를 두둔하는 것 역시 빨갱이라는 무서운 논리는 그래서 대중들이 비상식적인 일들을 목도하고도 선뜻 나서지 못하게 되는 기제로 작용했다. 송우석 변호사의 용기는 그래서 이러한 암묵적인 억압을 넘어서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거창한 정치적인 견해나 입장이 아니라 존엄성을 인정받아야 할 인간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시선과 고통 받는 그 누군가가 타자가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다.

 

빨갱이라는 우리식의 주홍글씨는 지금도 여전히 당대를 경험한 이들의 심리적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하지만 송우석이라는 변호사가 주저하다가도 결국은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하고 말하며 변호함으로써 그 트라우마를 이겨냈던 것처럼, 이 영화는 송우석의 변화를 통해 작금의 대중들 속에 남겨진 상식에 대한 지극히 당연한 갈증과 몰상식에 대한 분노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는 지점에서 법정에 선 송우석 뒤에 끝없이 호명되는 그의 변호인들의 대열에 대중들을 함께 서게 만든다. 빨갱이로 대변되는 국가의 억압은 여전히 유효한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