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기도, 형님뉴스, 뭔 말인지 알지
운전을 하면서 거래처에 전화를 하고 한 손으로는 네비게이터를 조작하면서 또 한 손으로는 초조하게 담배를 태운다. 그 모습에 거침없이 들이대는 일침. “이건 운전하는 것도 아니고...” 그 한 마디에 웃음이 터져 나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쫓기듯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허탈해진다. 이거 원 사는 게 사는 건지. 문득 떠오르는 목소리. “사는 게 사는 것 다워야 사는 거지”. 자신을 그렇게 만든 그 누군가를 향해 살짝 성을 내본다. 그래봤자. 알아듣기나 하겠어? “뭔 말인지 알지? 몰라? 몰라? 뭐 될래?”답답한 마음을 그런 식으로 풀어본다. 세태를 풍자하는 이른바 세태개그는 개그가 시작된 이래부터 꾸준히 있어왔지만 최근 들어 좀더 생활에 밀착된 느낌이다. 그 이유는 뭘까.
‘같기도’, 복잡한 세상, 넌 도대체 누구냐
개그콘서트의 ‘같기도’라는 코너가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는 지금 세태를 제대로 읽어낸 결과다. 20세기 분석의 시대에서 21세기 융복합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깔끔하게 분류되던 기준들은 모두 모호해졌다. 학문은 학문대로 경계를 허물었고 예술 역시 퓨전이란 형태로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그러니 우리 생활이 그러지 않으리란 법이 있을까. 핸드폰이라는 한 가지를 가지고 우리가 하는 것은 전화만이 아니다. 사진도 찍고 음악도 들으며 TV도 보고 인터넷도 한다. 사고방식이 달라지고 하드웨어 위에 얹어지는 소프트웨어가 달라지자 우리의 생활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생활의 멀티플레이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급변한 세태에 잘 적응된 사람들에 해당되는 말이다. 변화의 과정 속에서 적응 안 되는 사람들은 그걸 흉내내보려 하지만 이도 저도 아닌 꼴이 되기 십상이다. 잘 나가는 한류의 한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바이브의 ‘맨날 술이야’를 수리공의 ‘맨날 수리야’로 바꿔 부르던 김준호는 썰렁해진 상황을 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건 한류개그도 아니고 삼류개그도 아니여.” 웃기지 못하는 개그맨의 개그가 한류에서 삼류로 순식간에 전락하듯, 변화에 적응 못하는 자의 삶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으로 비춰진다. 혹 “넌 도대체 누구냐” 혹은 “너의 적응 안 되는 행동은 도대체 뭐냐”고 묻는 상황이 도래했을 때, 당혹스러웠던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같기도’라는 화법은 당혹스런 상황을 유머로 넘길 수 있는 시원스런 해결책이 되어줄 것이다.
‘형님뉴스’, ∼답지 못한 세상에 일갈
웃찾사의 ‘형님뉴스’가 반복하는 말은 “∼가 ∼다워야 ∼지’다. 이것은 거꾸로 당연히 ‘∼다워야 할 것’들이 ‘∼답지 못한’ 세태를 직설법으로 꼬집는 말이다. 그렇다. ‘형님뉴스’는 ‘같기도’처럼 우회하는 방식으로 세태를 풍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잘못된 세태 자체를 비판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그러니 뉴스 형식이 따라 붙는 것. 여기에 ‘형님’이 붙자 비판의 방식은 무식해 보이지만 보는 이들을 더 속시원하게 만든다. 비판의 대상 역시 우리가 신문 어느 한 구석에서 보았던 뉴스를 그대로 잡아온다. 그러니 현실의 세태를 고스란히 개그라는 도마 위에 올려놓는 셈이 된다.
칼자루를 쥔 형님들은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늘 현장에 나가있는 일용이를 찾지만 그는 엉뚱한 상황을 연출한다. 데스크에 앉아있는 형님들 역시 문제 제기와 전혀 엉뚱한 이야기들을 해댄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아무런 문제 해결이 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이런 심리가 깔려 있는 것 같다. 저렇게 무식한 형님들(?)도 “∼가 ∼다워야 ∼지’라고 외치는데 정작 ‘∼답지 못한’ 세태의 당사자들은 뭘 하고 있느냐는 코너 자체가 주는 비판이다. 문득 생활 속에서 ‘∼답지 못한’ 상황에 분노했다면 “∼가 ∼다워야 ∼지’라고 유머를 섞어 외쳐보는 건 어떨까. 듣는 이들이 공감했다면 이심전심의 중의적 웃음이 피어날 지도 모를 일이다.
‘뭔 말인지 알지’, 쇠귀에 경 읽기
개그야의 ‘뭔 말인지 알지’에는 말 귀 못 알아듣는 동수와 조리 있게 얘길 잘 못하는 정태가 나온다. 정태는 시종일관 “뭔 말인지 알지”를 반복하며 ‘뭔 말인지 모르는’ 동수에게 설명을 하려고 애쓴다. 이것이 점점 반복되면서 보는 사람의 답답함도 점점 커진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거기서 동수가 “알았다”고 하면서 엉뚱한 이야기를 해댈 때, 웃음이 터지는 것. 이 단순한 설정이 어떻게 이런 폭발적인 웃음을 유발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그와 똑같은 상황을 익히 경험한 시청자들과 관객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 아닐까.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 대고 무언가를 요청하는 것만큼 답답하고 속 터지는 일이 있을까. 마치 쉽게 해줄 수 있는 일인데도 절차만을 강조하며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처럼, 살면서 너무도 불합리한 경험을 했다면 ‘뭔 말인지 알지’의 정태가 겪을 답답함을 이해했을 것이다. 이 ‘쇠귀에 경 읽는’ 상황에서 정태가 쏟아내는 “몰라? 몰라? 뭐 될래?”하는 말이 그렇게 속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세 살 때부터 웃음이나 신용을 잃는(웃찾사의 띠리띠리)’ 사회,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이유가 고작 ‘회장님의 방침(웃찾사의 회장님의 방침)’인 사회, 늘 존재감이 없는 학생을 만드는 사회(개그콘서트의 까다로운 변선생), 고시생들을 양산하는 사회(개그콘서트의 노량진 블루스) 속에서 살아가며 참 가슴 답답해지는 분들이 참으로 많을 것이다. 이 세태개그가 주는 즐거움이 좀더 우리 생활에 밀착된 느낌을 주는 것은 이제 거대담론의 시대가 가고 생활에 밀착된 작은 담론의 시대가 온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답답한 세태가 우리 삶 속에 드리워져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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