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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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명랑TV

한드, 미드에서 배울 것들

D.H.Jung 2007. 5. 15.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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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제작만이 해답이다

한류는 가고 미드(미국드라마)가 오나?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던 미드는 케이블TV를 통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더니 어느덧 공중파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CSI 마이애미’가 현재 방영되고 있는 상황이며 곧 미드라는 불꽃에 휘발유를 끼얹은 ‘프리즌 브레이크’도 공중파를 통해 방영될 예정이다.

이것은 최근 ‘히어로즈’, ‘프리즌 브레이크’, ‘섹스 앤 더 시티’, ‘그레이 아나토미’ 같은 미드를 보지 않으면 대화에서 소외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는 미드의 수요를 방송사들이 읽은 것이다. 미드에 푹 빠진 이들은 우리 드라마가 시시해서 볼 수가 없다고 하는데, 우리 드라마가 좇아가지 못하는 대중의 트렌드를 미드의 어떤 면들이 사로잡은 것일까. 거기서 혹 우리가 배워야할 것이 있는 건 아닐까.

전체를 관통하는 스토리
평범한 사람들이 어느 순간 자신만이 가진 능력을 깨닫게 되고 그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소임을 갖게 되면서 흥미진진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히어로즈’에는 히로(마시 오카)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그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텔레포트의 능력을 갖고 있다. 이 드라마에서 히로가 갖는 의미는 지대하다. 그의 능력은 이 드라마가 가진 스토리를 무한히 해방시킨다.

드라마가 진행되는 와중에 갑자기 미래에서 온 히로가 다른 능력자에게 “지금 당신은 당장 치어리더를 구하러가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미리 벌어질 일에 대한 예고이자 그 예고를 지금 바꾸는 것이 능력자들의 소임이라는 걸 말해준다. 중요한 것은 이런 스토리가 가능하려면 이미 전체 이야기를 손아귀에 쥐고 있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은 사전제작이 보편화된 미드의 최대강점이다. ‘프리즌 브레이크’에 열광하는 것은 그 시리즈물의 연속성에서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마치 정교한 피스를 조립하는 듯한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석호필(스코필드)의 철저한 탈옥을 위한 준비는 사실 드라마 제작자들이 드라마를 만들어 가는 철저한 사전준비와 거의 일치한다.

사전제작은커녕 쪽 대본을 들고 찍는 우리 드라마가 가장 부족한 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스토리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최소한 사전에 이야기의 얼개를 거의 완벽하게 짜놓아야 가능하다. 지금 방영되고 있는 ‘히트’ 같은 작품에서 아쉬운 점이 바로 이것이다.

처음부터 전체 얼개인 연쇄살인범과 차수경(고현정)의 대립구도를 잡은 상태에서 차근차근 에피소드를 진행했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사전 제작된 초반부의 내용과 주단위로 드라마를 찍어낸 중반 이후의 내용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차수경이 아무리 입체적인 캐릭터라고 하더라도, 초반부의 차수경과 지금의 차수경은 너무나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굳이 전문직 드라마뿐만 아니라 멜로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종영한 ‘마녀유희’의 실패는 아무리 좋은 재료라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외면당한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탄탄한 스토리는 이제 명망 있는 연기자들보다 더 중요한 드라마의 성패 요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같은 멜로 드라마라고 해도 미드와 우리의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왜 미드는 멜로라도 뽀송뽀송한 걸까
우리의 멜로드라마는 퇴조하고 있는 형국이 뚜렷하다. 멜로라 하면 트렌디한 설정의 드라마들이나, 혹은 최루성 신파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드의 멜로로 대표적인 ‘그레이 아나토미’나 ‘섹스 앤 더 시티’ 같은 드라마들을 보고 있으면 분명 우리 드라마에는 없는 그 무엇이 감성을 자극한다. 그것은 ‘어쩌면 저렇게 뽀송뽀송한 걸까’하는 느낌이다.

‘그레이 아나토미’가 시작할 때 타이틀 롤을 보면 이 드라마의 성격을 단적으로 볼 수 있다. 외과의의 나이프가 화면 위에 떠올랐다가 사라지면, 이어서 여성들의 눈썹집게가 화면에 이어진다. 수혈되는 피를 따라가면 붉은 빛의 와인 잔이 다음 장면으로 이어진다. 즉 이 드라마는 의사라는 전문직과 여성들의 사랑이라는 멜로를 엮은 작품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였다면 즉각 비판이 나왔을 멜로와 전문직의 결합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 이유는 이 드라마가 매 에피소드마다 내세우는 주제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멜로 드라마들은 주제가 너무 피상적이고 무겁다. 예를 들어 불치와 불륜이 많이 나오는 것은 멜로의 주제가 삶이나 죽음까지 맞닿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미드가 가진 멜로드라마의 주제는 ‘실용적’이다. ‘그레이 아나토미’의 부제들을 봐도 ‘전투에선 이기고 전쟁에선 지다’, ‘남자 없는 세상’처럼 무거움이나 과도한 심각함이 없다. 똑같은 ‘고통’이란 주제를 다룰 때, 우리 드라마가 삶의 어려움 같은 무거움을 넣어 캐릭터를 울리는 반면, 미드는 마치 실험실의 화학반응을 보여주듯 담담하게 여러 고통의 모습들을 유머를 섞어가며 그려낸다. 시청자의 느낌은 확연히 달라진다. 눈물 젖은 질척함과 뽀송뽀송한 유쾌함으로 나눠지는 순간이다.

사전제작만이 답이다
우리드라마는 지금 위기이자 기회의 시간들을 갖고 있다. 변화의 길은 분명 저 앞에 보이고 있지만 지금 당장의 변화는 현실이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 드라마의 최대 수입국이었던 일본이 자체적으로 한류에서 힌트를 얻은 멜로 드라마를 양산하고 있고, 동시에 미드라는 강력한 드라마들이 FTA로 활짝 열린 TV로의 진출을 예고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도 얻은 것은 있다. 그것은 안일한 기획이나 몇몇 스타들만 내세운 드라마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남은 건 단 하나다. ‘철저한 제작’이다. 100% 사전제작이 당장 어렵다면 적어도 전체 틀을 관통하는 철저한 대본이라도 사전 제작되어야 한다.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초기의 힘을 잃고 쉬운 방식의 전통적인 멜로로 흐르는 것 역시 사전 제작이란 틀 안에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