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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영화로 세상보기

‘검은집’, 마음의 공간이 주는 공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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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집’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공간에 대한 공포영화다. 그 공간은 전준오(황정민)가 다니는 회사의 칸막이로 둘러쳐진 자신만의 책상이기도 하고, 애인 장미나(김서형)와 함께 편안한 저녁을 보내는 집이기도 하며, 건널목이 고장난 철길이기도 하고, 목욕탕을 개조해 살아가는 박충배(강신일)와 신이화(유선)의 검은집이기도 하다.

공간이 공포를 주는 이유는 그 프레임 안에 유령보다 더 무서운 칼든 사람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비어 있을 때 더 공포를 느끼게 한다. 반면 무차별적인 살인마가 구체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순간, 그 긴장감과 공포감은 줄어들고 대신 그 감정은 긴박감으로 전이된다.

어둠으로 가려진 빈 공간이 공포를 주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 공간에 남겨진 누군가(그것이 사람이든 유령이든)의 흔적이고, 또 하나는 그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관객 스스로 빈 공간에 채워 넣은 두려운 상상이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 생각하기 싫은 그래서 의식 저편으로 넘겨버리고픈 끔찍한 그 무엇을 눈앞에서 목도할 것이란 예감. ‘검은집’은 그렇게 빈 공간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무의식 속에 숨겨둔 어두운 공간(검은집)을 끄집어낸다.

보험사정원 전준오에게도 바로 그 어두운 공간이 있다. 어린 시절, 자살한 자신의 동생에 대한 죄책감이다. 그가 “자살해도 보험금을 받을 수 있나요?”라는 전화를 받기 전까지, 그 어두운 공간은 적어도 꿈이라는 무의식의 틀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상담자 개인의 정보를 이야기하거나 감정을 표현하지 말라’는 근무 매뉴얼을 어기게 되는 순간, 끔찍한 무의식은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의 무의식 속에 자리한 죄책감이라는 검은집은, 박충배의 집에서 아이의 죽음을 목격하는 순간부터 밖으로 빠져나온다.

어린 시절의 악몽은 박충배의 집에서 목격한 아이의 죽음으로 꿈이 아닌 현실이 되며, 그 현실로 드러난 무의식에 대항해 전준오의 의식은 싸움을 시작한다. 빈 공간은 이제 구체적인 모습으로 그 추악함을 드러낸다. 전준오의 의식처럼 정돈되어 있던 그의 집은 이 마음 없는 살인자에 의해 난도질된다. 그리고 결국 전준오는 그토록 보고싶지 않던 무의식을 닮은 검은집 속으로 뛰어들어야만 하는 상황에 몰린다.

그런데 전준오가 그냥 지나쳤으면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에 뛰어든 것은 그의 입버릇처럼 나오는 ‘인간의 마음’이나 ‘양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용서받고 싶었다”는 전준오의 말은 그것이 죄책감을 벗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말해준다. 사투의 와중에 “이쯤 되면 사람 다 똑같다”는 살인자의 말은, 마음이라는 의식의 허울로 어두운 무의식을 가리며 살아가는 사람을 섬뜩하게 응시한다.

이처럼 ‘검은집’이 가진 이야기는 소재나 내용, 그리고 지적인 재미의 측면에서 기존 우리네 공포영화의 새로운 영역을 넓힌 공이 크다. 그럼에도 관습적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신체절단 같은 충격적 장면들이 오히려 영화의 공포감을 떨어뜨리는 것은 왜일까. 구체적인 장면들보다는 좀더 많은 여백을 넣었더라면 그 빈 공간이 주는 공포감이 더 컸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