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다이하드4.0',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 아버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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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하드4.0',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 아버지

D.H.Jung 2007. 7. 20.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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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하드 4.0’에서 아버지가 떠오른 이유

‘다이하드’시리즈가 여타의 액션영화와 다른 점은 형사라는 노동의 피곤함을 액션에 녹여낸다는 점이다. 일상의 피곤함에 절어있는 귀차니스트 존 맥클레인(브루스 윌리스)에게 가족과 얽힌(남 일이었다면 이렇게 죽어라 뛰어다녔을까) 테러사건이 벌어진다. 그러자 이 나른해만 보이던 남자는 가부장으로서의 놀라울 정도의 끈질긴 근성을 발휘해 테러를 진압하고 가족을 구해낸다.

어찌 보면 단순해 보이는 이 설정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액션에 스며들어 있는 아이디어와 유머이다. ‘다이하드’는 제한된 공간에서의 액션을 선보인다. 1편이 빌딩이고 2편이 공항이며 3편은 뉴욕시가 됐다. 제한된 공간이라는 점은 그 공간이 가진 특성을 활용하는 액션이 가능하다는 역설적 기능을 한다. 빌딩은 고층에서 뛰어내리고 창으로 뛰어들고 하는 액션들이 묘미를 주고, 공항은 연료통을 열어놓고 떨어진 맥클레인이 라이터로 불을 붙여 비행기를 날려버리는 유머 섞인 액션이 가능해진다.

이런 상황이니 4편의 배경을 어디로 할 것인가가 고민이 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다이하드 4.0’은 한때 카리브해의 유람선을 배경으로 계획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이하드 4.0’의 선택은 사이버라는 새로운 공간이었다. 절묘한 것은 지금까지의 존 맥클레인이 보여준 액션이 말 그대로 생노동에 가까운 아날로그의 첨단을 걸어왔다는 점이다. 디지털 세상이 가진 위악과 허망함을 모두 액션에 넣어 풍자할 수 있는 데다가, 20년 간 유지해온 캐릭터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사이버 공간은 ‘다이하드 4.0’의 최적공간이 아닐 수 없다.

디지털 테러로 보여지는 디지털 세상이란 컴퓨터 하나로 미국 전역을 공포에 떨게 만들 수 있는 위악을 가진 공간이면서 동시에 주먹 한 방으로 부숴 버림으로써 테러를 막을 수 있는 허망한 공간이다. 맥클레인이란 아날로그 형사는 자판을 두드리는 세상에도 여전히 주먹이 더 쓸모 있다는 걸 보여준다. 다만 컴맹인 맥클레인을 위해 매튜 페럴(저스틴 롱)이란 해커가 붙는다. 그런데 이 매튜란 캐릭터와 맥클레인의 조합 또한 절묘하다. ‘다이하드’시리즈에서 맥클레인의 노동(?)이 가족을 위해 이루어진다는 공식 속에 매튜와 맥클레인의 관계는 유사가족을 형성한다(물론 딸이 등장하기는 한다).

마치 컴퓨터에 능통한 아들이 컴맹인 아버지를 도와 아버지가 해야만 하는 엄청난 일을 해내는 것처럼 이 영화는 영리하게도 둘의 관계를 밀착시켜 놓았다. 여기에는 또한 디지털 세상에 살아가는 관객의 대리인으로서의 매튜라는 캐릭터도 존재한다. 관객들은 매튜 같은 일상 속에서 갑자기 거대한 사건 속에 휘말리고 맥클레인이라는 아날로그 형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다이하드 4.0’이라는 모험의 터널을 함께 통과하는 짜릿함을 느끼게 된다.

이 영화는 또한 디지털 영상으로 가득한 작금의 액션 영화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스턴트로 하는 땀내 나는 액션들을 선보이며 관객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여기에 쫓아오는 헬기를 향해 총알처럼 날아가 꽂히는 자동차나, 터널 속에서 디지털로 조작된 신호에 의해 양방향에서 몰려오는 차들의 충돌 장면 같은 것들은 정말 다이하드적이라 할 수 있는 액션의 유머와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시퀀스들이다.

이 블록버스터에서 어딘지 정감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절묘한 공간의 설정과 노동을 끌어들인 액션 히어로, 디지털 세상의 아날로그 형사라는 기막힌 스토리 설정, 매튜 같은 현 관객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만한 캐릭터의 설정,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아날로그적 액션들이 어우러지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버전업된 내용들이 ‘다이하드 4’가 아닌 ‘다이하드 4.0’이라 붙인 이유다.

세월이 19년이나 흘렀지만 여전히 ‘다이하드’라는 제목에 관객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이 ‘다이하드’한 액션이 어느 때 보아도 ‘다이하드’한 사회를 연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에 절어 귀차니스트가 된 존 맥클레인은 이 시대 샐러리맨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거의 졸다시피 하던 귀차니스트가 가족이란 이름에 벌떡 일어나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노동의 현장(?)에 뛰어드는 것은 지금 우리네 샐러리맨들의 일상이기도 하다. 게다가 ‘다이하드 4.0’이 제시한 디지털 테러는 컴퓨터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네 아버지들 앞에 던져진 재난을 말하는 것만 같다. 형사라는 ‘다이하드’한 직업이 일상이 된다는 것은 퍽이나 슬픈 일이다. 그만큼 그의 삶이 거칠다는 뜻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