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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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어느 멋진 날’, 오빠가 돌아왔다

D.H.Jung 2006. 6. 8.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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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멋진 날>에 등장하는 오빠의 문제

오빠가 돌아왔다. 그가 돌아온 것은 다름 아닌 여동생 때문이다. 그는 여동생을 사랑한다. 그런데 여동생은 어린 시절 다른 집에 입양됐다. 그리고 지옥 같은 세월들을 살아왔다. 그 입양된 집의 의붓오빠가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오빠가 돌아왔으니 이제 시청자들은 안심한다. 여동생은 이제 친오빠의 보호아래 제대로 된 건실한 남자를 만나 결혼해 잘 살아갈 것이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다. 이 오빠는 남매관계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 여동생을 사랑하는 것 같다. 그것은 여동생도 마찬가지다. 그 지옥 같은 세월들을 버티게 해준 것은 다름 아닌 오빠가 자신을 찾아와 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것은 분명 사랑이었다. 자세히 알고 보니 이 오빠도 여동생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복남매였다. 오빠가 돌아온 것은 어린 시절 잃었던 가족을 찾기 위함인가, 아니면 사랑하던 여동생을 찾기 위함인가.

MBC 수목드라마 ‘어느 멋진 날’을 보고 있으면 그 복잡한 관계 속에서 ‘오빠’라는 단어에 대한 혼동이 온다. 저기서 오빠라고 부르는 것은 남매 관계에서의 오빠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연인관계에서 우리가 흔히 부르는 그 호칭을 말하는 것인가.

오빠와 오빠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
이복남매의 사랑은 이제 이 시대 드라마의 한 트렌드가 된 것 같다. ‘가을동화’에서 저 은서(송혜교 분)에게 돌아온 오빠, 준서(송승헌 분)가 그랬고, ‘피아노’에서 수아(김하늘 분)에게 돌아온 오빠, 재수(고수 분)가 그랬다. 법적 남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다룬 ‘천국의 나무’에서는 여동생 하나(박신혜 분)를 사랑하는 윤서(이완 분)가 등장했다.

실제로 남매는 아니지만 유사한 뉘앙스를 풍기는 드라마들도 있다. ‘천국의 계단’에 나온 송주(권상우 분)와 정서(최지우 분)가 그렇고, 최근에 종영한 ‘봄의 왈츠’의 재하(서도영 분)와 은영(한효주 분)이 그렇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어느 멋진 날’의 건(공유 분)과 하늘(성유리 분)의 사랑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이다지도 우리네 드라마 여주인공들은 오빠와 사랑에 빠지는 걸까.

오빠, 나를 지켜주는 강한 남성
드라마를 보면 우리네 ‘오빠’라는 호칭은 참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걸 알 수 있다. 남매 사이에 쓰이는 ‘친오빠’, 후배가 선배를 부를 때는 호칭으로의 ‘오빠’, 연인관계에서 부르는 ‘오빠’가 그것이다. 그중 연인관계에서 여성이 남성을 오빠라고 부르게 된 것은 90년대 이후부터라고 한다. 그 전에는 주로 ‘자기’라고 불렀다.

‘오빠부대’라는 말속에는 오빠라는 호칭에 대한 애착이 담겨져 있다. 오빠는 연인과 달리 무조건적으로 동생을 보호해주는 사람이라는 여성들의 환타지와, 자기를 오빠로 불러주는 사람을 반드시 지켜야한다는 남성들의 환타지가 잘 맞아떨어진 결과다. 또한 오빠라는 호칭은 남성들에게 아저씨로 대변되는 비호감의 반대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다.

드라마에서 오빠에 대한 이러한 환타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남성’보다 편안하면서도 헌신적인 ‘오빠’에게 여성 시청자들은 쉽게 빠져든다. 남성 시청자들은 ‘오빠’라는 말을 듣는 순간 무언가 가슴속에서 꿈틀대는 ‘동생보호욕구’에 사로잡힐 것이다. 이렇게 오빠라는 호칭을 하나의 환타지로 보면, 사실상 대부분의 드라마의 관계들은 많은 유사 오빠와 여동생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환타지와 금기가 만나는 순간
그런데 이 환타지가 부닥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근친간의 사랑이라는 금기이다. 과거 같으면 도저히 드라마 소재로 나오기 어려웠던 이 금기는 ‘이루어질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보여진다. ‘이루어질 수 없다’고 했으니 금기를 넘어선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아름다운 사랑’이라 했으니 어쩌면 금기를 넘어선 것인지도 모른다.

드라마가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어떤 환타지를 충족시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드라마 속 금기의 실현은 이중의 안전망을 갖게된다. 그 첫 번째는 드라마라는 대체물이 주는 안전망이고 두 번째는 드라마가 제공하는 자기합리화라는 안전망이다. 아슬아슬한 환타지와 금기가 만나는 순간, 시청자들은 이것은 드라마일 뿐이야 하는 안전망을 갖고, 그 주인공들에 자신을 투사하면서 금기를 넘는 아찔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비극적 결말을 보면서(근친간의 사랑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시청자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안심하게 되는 것이다. “알고 보니 이복남매였다더라”는 설정은 현실로의 무사안착을 위해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그것은 장치일 뿐이다. 이복남매기 때문에 사랑해도 된다는 논리는 바람일 뿐이지 실제로 그렇다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근친간의 사랑에는 혈연과 가족으로 대변되는 우리네 정서 또한 깔려있다. 혈연 드라마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하늘이시여’가 많은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구가했던 것은 바로 이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혈연, 가족 코드 때문이다. 흩어진 가족의 귀환 또는 재건은 그 방법이 어떻든 대부분 허용된다는 것을 우리는 ‘하늘이시여’를 통해 알게됐다. 근친간의 사랑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입양의 문제는 금기에 대한 안전핀이기도 하지만 흩어진 가족의 재건을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어느 멋진 날’은 어느 길을 갈까
‘어느 멋진 날’에서 하늘은 완벽해 보이지만 전부가 가짜인 유사가족들의 어항 속에 갇혀 있다. 엄마와 아빠는 하늘을 죽은 딸로만 대하고 있고, 오빠는 금기의 사랑에 집착하고 있다. 건은 불량해 보이지만 진짜 가족 같은 구경택(이기열 분)과 그 자식들과 함께 새로운 가족을 꾸리려 하고 있다. 이 새로운 가족의 재건이 아마도 이 드라마의 주제가 될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저 유사가족의 어항 속에 갇혀 있는 하늘을 구해오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가족을 꾸리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하늘이 건을 향해 “오빠는 날 버리지 않았어. 꼭 다시 날 찾아올거야”라고 말할 때, “오빠 고마워. 잊지 말고 찾아와 줘서”라고 말할 때 가슴이 뭉클한 것은. 하늘이 호칭하는 오빠가 그 오빠가 아닌 것 같은 느낌에 아찔한 것은 왜일까. 그것은 금기를 넘어선 아찔함일까, 아니면 저 가증스러운 유사가족으로부터 동생을 지켜내는 든든한 오빠에 대한 환타지 때문일까. 오빠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