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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서울 1945’논쟁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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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1945>가 보여주는 이념의 문제

최근 KBS 드라마 ‘서울 1945’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재미있는 건 드라마 논쟁이라고 하면 드라마의 내용이나 출연자 등에 대한 것이 대부분인데 반해, 이 논쟁은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의 시각이 부딪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유족과 보수단체에서 제기했다. 극중 인물인 박창주의 대사를 통해 여운형 암살사건이 방영되면서 마치 그 배후에 이승만, 장택상이 연루됐을 거라고 암시된 부분, 친일파의 딸인 문석경이 이승만 전 대통령의 거처인 돈암장에 드나들었다는 설정, 이승만 전 대통령이 미군정과 밀착되었다고 묘사된 점, 정판사 위폐 사건 당시, “이승만은 친일파 돈을 맘대로 쓰는데 우리가 위폐 만드는 게 무슨 죄냐”는 대사 등에 대해 유족과 관련단체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그러자 보수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이런 드라마를 방영한 KBS를 난타하기 시작했다. 비판은 일파만파 도를 넘어서면서 ‘대한민국 건국의 원훈(元勳)들을 중상 모함하고 있다’, ‘마치 북한에서 대한민국을 헐뜯기 위해 제작한 드라마 같았다’ 같은 이야기가 나오더니, 결국 조선일보는 ‘KBS 왜 이렇게 대한민국 건국 헐뜯나’라는 사설에서 이 드라마가 “건국주역을 헐뜯고 좌 편향적 시각으로 해방전후사를 왜곡하고 있다”면서 급기야는 KBS가 “대통령 탄핵 때 광적으로 방송한 정권 편향 경력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끄집어냈다.

제작진들의 입장은 확실하다. 이 드라마는 “이념드라마라기보다는 멜로드라마”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념드라마라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과거 ‘배달의 기수’류의 반공드라마가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만일 이념드라마라고 해도 이 드라마를 꾸준히 보아온 필자로서는 도대체 이 드라마가 어떤 이념을 내세우고 있는가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좌익 편향이라고 하지만 그렇다면 보수언론들이 좌파의 대표격으로 몰아세우는 최운혁이라는 인물이 친일파의 딸인 문석경을 탈출시키는 얘기나, 문석경이 친일파인 아버지의 뜻과는 정반대로 최운혁을 찾아 러시아를 헤매던 얘기, 이승만 박사의 최 측근인 이동우가 최운혁의 탈출을 돕는 얘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좌와 우(만일 그런 게 있다면)의 대결양상이라기보다는 이념 사이에 끼인 인물들이 겪는 시대의 고통과 사랑이 축이 아닐까. 드라마의 내용은 어떤 흐름 속에서 판단해야지 특정 부분만 떼어내 평하는 것은 자칫 부분으로 전체를 가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소위 좌파적이라는 꼬리표를 달게된 것은 보수 언론의 덕이다. 실제로 이 드라마는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대부분의 드라마들에서는 보기 드문 시각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서울 1945’는 과거라면 절대로 다루지 못했을 시각으로 당시의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바대로라면 이승만 전 대통령은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를 구해낸 민족지도자가 되어야 마땅한 일일 텐데, 이 드라마는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그렇게 다루고 있지 않다. 드라마 속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민족을 생각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입지를 지키는 것에 더 혈안이 되어있는 것 같다.

드라마 속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친일파라는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그의 주변으로 친일파를 포함해, 미군정이 모여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가 이승만 전 대통령을 친일파로 매도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드라마 초기에는 미국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민족주의자 이승만 박사가 등장하는 것이 사실이며, 소극적인 몇몇 장면들로 그를 친일파로 몰아세우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봐도 이승만 전 대통령은 친일파라기보다는 없는 지지세력을 만들기 위해 친일파를 받아들인 인물에 가깝다. 지난해 발굴된 당대의 국무회의록 등의 실증자료들에는 실제로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해방 직후 친일파 처단을 위해 활동했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와해공작에 직접 개입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입지를 위해 역사바로세우기를 하지 않은 인물일 뿐, 보수단체의 말대로 분명 친일파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그를 친일파로 생각하는 건, 그런 권력 집착적인 일련의 그의 행위들이 그가 했던 많은 공적을 가리기 때문이다. 후에 장기집권을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는 것으로 보면, 이승만 전 대통령이 분명 초창기에는 민족주의자로서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후에는 과도한 권력의 집착을 보였다는 과오를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따라서 그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인물이다. 이는 1998년 대한민국정부수립 50주년을 맞이해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이 한 조사에서도 명백히 나타난다. 그 조사에서 이승만은 우리 역사상의 긍정적 인물 8위이면서 동시에 부정적 인물로 6위에 올랐다. 게다가 같은 여론조사의 전문가 집단 교수 50명에 의한 평가에서는 부정적 인물로 몇 단계 위인 4위에 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평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진행중이라는 걸 이번 ‘서울 1945’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드라마가 소위 좌파적이라고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빨갱이라고 배워왔던 좌파 성향의 지식인들을 민족지도자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정말 세상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누구나 할만한 시각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드라마 주인공으로 중도좌파의 인물을 내세운 것은 이 드라마가 최초가 아닐까. 그러니 이 드라마 시청자들은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대체로 시청자들은 드라마 주인공에 감정이입하며 보기 마련인데 중도좌파적 시각을 가진 인물에 감정이입하다 보면 그간 의식화되어 왔던 ‘좌파 = 친북 = 빨갱이’라는 괴물이 속에서 꿈틀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좌파라는 괴물은 정말 친북, 빨갱이일까. 본래 좌익은 진보, 혁신적 정파를 말하고 우익은 점진, 보수적 정파를 말한다. 하지만 진보라고 하면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던 것이 좌파라고 하면 무언가 큰 문제라도 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우리가 좌파라는 단어를 그만큼 곡해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강조하는 입장이 보수이며, 민주 즉 평등을 강조하는 입장이 진보라고 분류되는데 우리나라에서의 보수와 진보라는 말은 마치 반공 반북과 친북 친공이라는 의미로 곡해되어 있다. 이것은 아무래도 남북 분단 상황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미국과 영국에도 분명히 좌익이 있고 진보가 있다. 아무리 남북 분단 상황이라고는 하나 진보, 혁신은 없고 보수만 있는 나라를 상상할 수 있을까.

게다가 1990년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하면서 탈냉전, 탈이념 시대가 도래한 상황에서 이러한 이념 논쟁은 진부한 것이 되어버렸다. 탈냉전 이후 우리가 사는 다원주의 사회에는 진보도 있고 보수도 있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드라마 한 편에 유신독재 시절에나 어울릴 좌파 운운하는 단어를 끄집어내 좌우논쟁을 일으키는 건 너무 과한 것 같다. 물론 이 드라마는 이념드라마가 아니지만 만일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비판받을 일일까. 보수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드라마들이 대부분인 마당에 한 편쯤 내버려둬도 되지 않았을까.

재미있는 건 이러한 논쟁이 불거져 나온 시점이다. 5.31 선거가 여당의 참패로 끝나고 불과 열흘 사이에 논란이 나온 것이다. 논란에서는 좌파 우파 하지만 사실은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 맞을 것이다. 아마도 보수단체들은 이번 선거의 압승을 진보의 패배로 몰아가는 것 같다. 이런 시기에 진보 보수 논쟁은 그러한 편가르기에 능한 정치인들에게는 상당한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이번 선거의 이유를 진보의 패배로 몰기는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닐까.

KBS 드라마 ‘서울 1945’에 대한 역사 왜곡 논란은 분명한 역사적 평가나 조사가 진행중이라는 점에서 과거 역사 자체에 대한 진위 논란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역사를 바라보는 두 시각 사이의 충돌이라고 볼 수 있다. 21세기 다원주의 사회에 들어서까지 좌니 우니 하는 논란이 나오는 것은 우리네 근현대사의 아픔이 여전하며, 그걸 뛰어넘으려는 어떤 노력보다는 오히려 그 한계를 이용해 정략적으로 활용해온 우리네 정치판을 반증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