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드라마, 월드컵에서 배워라

728x90

드라마와 월드컵

요즘 월드컵 특수로 TV는 이른바 월드컵과 드라마의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TV들이 온통 월드컵에 올인하는 상황에서 드라마들은 슬금슬금 옆으로 빠지거나, 빼내진다. 2002년의 월드컵이라는 ‘각본 없는 드라마’가 이룩한 성과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4년이란 긴 시간을 거친 지금에까지 그 맹위를 발휘하고 있다.

2002년에 월드컵 4강 신화에 비견되는 문화적 사건이 있었는데 그 주역은 바로 우리네 드라마들이었다. <겨울연가>를 필두로 당시 일본에 수출된 드라마는 1300편이 넘으며 수출액만도 100만 달러를 넘어섰다. 우리네 드라마들은 한류바람을 일으키며 일본으로 중국으로 수출됐다.

그런데 작금의 드라마들을 보면 어떤가. 모든 드라마들을 천편일률적으로 재단할 수는 없겠지만 늘 비슷비슷한 설정과 스토리의 드라마들이 시청자들을 식상하게 만들고 있다. 조폭 아니면 멜로라는 소재의 획일화, 비비꼬인 인물관계, 한 꺼풀 벗겨내면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설정, TV방송에는 어울리지 않는 선정적인 장면들, 툭하면 남매, 툭하면 혈연인 코드 중심의 드라마들이 매일 전파를 타고 있다. 일단 제목과 첫 회를 보면 전체를 대충 감 잡을 수 있는 이런 드라마로는 더 이상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잡아놓지 못한다. 이것이 ‘각본 없는 드라마’ 월드컵에서 드라마가 배워야할 점이다.

각본 없는 드라마 vs 드러나는 각본
우리가 흔히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말하지만 월드컵의 재미는 그 의외성에 있다. 전력으로는 누가 봐도 승산 없는 경기에서 이변이 속출하는 것. 그래서 공은 둥글며 어디로 튈지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 드라마들은 어떤 상황 전개를 함에 있어서 의도가 쉽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예민한 시청자들은 지금 이 장면으로 인해 잠시 후엔 이런 전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한다. 심지어는 앞의 몇몇 장면으로 결말까지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시청하는 순간 극은 긴장감을 잃고 이른바 김이 빠지게 된다.

예를 들면 ‘소문난 칠공주’는 그 제목에서부터 벌써 이 드라마의 내용과 결말 주제까지를 모두 도출해낼 수 있다. ‘딸 부잣집 이야기’라는 전통적인 드라마 구조를 그대로 가져온 탓이다. 이런 드라마에는 늘 등장하는 것이 가부장적인 아버지고 핍박받는 가족들이다. 이런 트렌디한 방식을 시청자들이 좋아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이미 한번 사용되었을 때 신선함을 잃은 방식이다.

최근 이런 드라마들이 꽤 많은 이유는 아마도 이제 드라마를 하나의 작품으로 보고 창작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내려는 노력보다는, 상업적인 성공을 목적으로 자극적이고 트렌디한 몇몇 설정들을 끌어다 이야기를 붙여 기획한 작품들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래도 선 기획된 작품에 살을 붙이는 작업에는 잘 쓰이는 드라마 문법에 먼저 손이 가기 때문이다.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감독 vs 작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드라마
경기가 다 끝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누가 골을 넣을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건 시청자도 마찬가지고, 경기를 뛰는 선수들도 마찬가지며, 그들을 조련한 코치나, 위치를 지정해준 감독도 모른다. 작가라는 감독은 캐릭터들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힘에 귀기울여야 하고, 필요할 경우엔 방향성을 지정해줘야 하지만, 조종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조종하는 순간, 그들은 자율성을 잃고 창의적인 게임을 하지 못하게 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긴장감을 잃지 않는 드라마 진행을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작가가 극중 캐릭터들에게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때로 어떤 드라마는 작가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실제로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창작의 공간에서는 신의 권위를 부여받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가 모든 걸 조정하기 시작하면 살아있던 캐릭터는 죽고 인형들만 난무하는 드라마가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요즘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라는 오명을 얻고 있는 ‘하늘이시여’나 ‘소문난 칠공주’다. 최근 ‘하늘이시여’에서 벌어진 공포의 캐릭터 사망 해프닝(소피아의 급사)은 작가가 신이라는 걸 명백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것은 작가가 자극적인 설정을 위해 캐릭터 몇 죽이는 것은 예사로도 할 수 있다는 섬뜩한 현실을 보여준 것은 아닐까. ‘소문난 칠공주’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 현실에서는 벌어지기 어려운(예를 들면 임신한 딸을 질질 끌고 다니는 식의)사건들이 벌어지는 것은 작가에 따라 캐릭터들은 어떤 상황도 감수해야만 한다는 걸 말하는 것 같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이렇게 작가의 의도가 과잉된 드라마는 늘 문제와 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작품이라기보다는 지독한 상업주의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그 논란마저도 마케팅의 한 방법으로 활용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는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라는 괴물을 만들었다. 작가라는 감독은 선수(캐릭터)들 독려하고 방향성을 줘서 스스로 살아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선수가 살아있지 않은 드라마는 더 이상 드라마로서의 가치를 잃는다.

스피디한 전개 vs 연장방송
현대축구는 스피디한 전개의 공격축구가 대세라고 한다. 월드컵이 재미있는 것은 그 박진감 넘치는 경기에 있다. 만일 소극적이고 수비 중심의 경기를 양 팀이 한다면 그만큼 지루한 경기도 없을 것이다. 초반에 점수를 따냈다고 수비만 하고 있다면 오히려 역전의 빌미를 줄 수도 있고, 그렇게 이겼다고 하더라도 그건 감독으로서 선수로서 그리 떳떳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드라마에 있어서 박진감 넘치는 전개는 이제 대부분 드라마의 정석이다. 따라서 첫 회를 보면 그 속도감이 얼마나 빠르고 그 빠른 시간 내에 앞으로 전개될 드라마의 기대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성공을 예감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 드라마 자체의 끌림보다는 관성에 힘입어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여기에 만일 초반의 승기를 잡은 경우, 작가나 PD나 방송사는 ‘슬슬 경기를 하면서 점수나 지키는’ 연장방송의 유혹을 받게된다. 축구경기는 전후반 90분을 해야지 재미있다고 한없이 늘린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인가. 이때부터 드라마의 박진감은 사라진다. 결론이 궁금해 관성적으로 보는 시청자들에게 30회에 나와야 할 새로운 국면을 40회로 미뤄 시청률을 유지하는 데만 주력하는 것이다.

이렇게되면 이미 작가나 PD는 스스로 자기가 만든 작품을 죽인 셈이 된다. 마음대로 늘리고 줄이면서 어떻게 작품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을까. 어쩌면 애초부터 자신의 작품을 생명이 없는 피조물, 시청률에 앵벌이하는 인형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새로운 기량의 발굴 vs 잘생긴 얼굴의 활용
축구장안에서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박지성은 아름답다. 과감하게 상대편 진영을 파고들고 때로는 발에 걸려 넘어지고 때로는 슛으로 골을 선사하는 그는 아름답다. 하지만 축구장이 아닌 다른 곳이라면 어떨까.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얼굴이라 광고 속에서 그는 이제 자연스러워졌지만 처음 그의 광고 장면들은 너무나 어색하게만 보였다. 광고나 TV에 어울리는 얼굴은 아니기 때문이다. 축구선수는 축구를 잘하면 된다. 그것이 아름다운 축구선수다.

요즘 드라마에서는 ‘연기자 = 선남선녀’라는 등식이 많이 깨진 게 사실이다. 그것은 아마도 시대가 ‘잘 생긴 얼굴’보다는 ‘개성 있는 얼굴’쪽에 더 손을 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몇몇 드라마에서는 연기의 기량이 좀체 나아지지 않는 잘 생긴 얼굴들을 보게 된다.

‘스마일 어게인’을 보다보면 이동건과 김희선 사이에 연기의 간극이 있다는 걸 감지하게 된다. 둘 다 ‘선남선녀’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연기자들이지만 이동건은 마치 무너지기 위해 총력을 다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반면, 김희선은 드라마 캐릭터 오단희에 아직 몰입되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보고싶은 건 축구장에서 넘어지고 깨지면서 뛰어다니는 박지성이지, 광고 속에서 폼잡는 박지성이 아니다.

다양한 캐릭터로 변신해야만 하는 연기자로서는 ‘잘 생긴 것’이 오히려 부담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걸 뛰어넘기 위해 부단히도 무너지고 자신을 깨는 연기를 선보이려 노력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기량을 가진 얼굴이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주몽’의 허준호와 송일국이다. ‘주몽’의 인기는 그 요인이 여러 가지가 되겠지만 그 중 연기자들의 몫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허셀크로라는 닉네임을 얻을 정도로 카리스마 연기를 펼친 허준호, 그 카리스마 속에서도 오히려 더 빛나는 송일국은 이 드라마 초반부의 힘을 실어주었다. 경기 초반의 이런 활기는 전체 경기를 압도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과거 같으면 허준호같은 카리스마가 나오면 다른 연기자는 눈에 띄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송일국의 연기는 그 속에서도 살아났다. 허준호가 부러지지 않는 단단한 소나무였다면 송일국은 유연하게 휘면서도 카리스마를 잃지 않는 대나무 같은 차별점을 연기했기 때문이다. 허준호가 신적인 영웅이라면 송일국은 인간미 넘치는 영웅을 연기했기 때문이다. 이 두 기량이 잘 어우러져 8회만에 시청률 30%라는 골을 선사하게 된 것이다.

우리 식의 축구 vs U턴 하는 한류
힘이 넘치는 유럽축구와 화려한 개인기의 남미축구가 있었지만 2002년 월드컵을 치르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 식의 축구라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히딩크라는 감독을 만나 우리는 우리 식의 축구를 갖게 됐다. 그것은 강인한 체력과 미드필드의 압박, 그리고 조직력이다. 그런데 이 우리 식의 축구는 이제 현대 축구의 흐름이 되었다. 그것은 히딩크라는 명장이 미리 현대 축구의 흐름을 읽고 거기에 우리의 장점을 접목해 그 성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우리 식의 드라마, 대중문화, 우리네 한류는 최근 역류하거나 혹은 U턴 중인 것 같다. 일류(日流)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일본 원작들이 드라마화 되었거나 준비중이다. 대표적인 것이 ‘연애시대’와 ‘101번째 프로포즈’이다. 물론 원작은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지만 드라마들은 상당한 해석을 통해 우리 것으로 바뀌었고 작품의 질도 높다. 그래서 이 드라마들은 다시 일본으로 역수출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작품을 제작해서 유통하는 한 방법으로 잘못된 것은 없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사례가 하나의 전례로 흐름을 타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 여기저기 쉽게 원작을 사다가 각색해 만들어 되팔게 되다가는 자칫 원작 없는 명품 리메이크만 넘쳐나는 기형적인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다. 외국 것을 가져다 드라마로 성공시키면 드라마로서는 수입을 얻을 수 있겠지만 결국 그 원작을 돕는 꼴밖에는 안 된다.

문제는 우리 것에 대한 자신감이다. 말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네 정서를 보여줄 수 있는 우리 소재들을 찾아내고 그걸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코드로 풀어내야 한다. 물론 과감한 작품과 작가의 발굴이 선행되어야 우리 것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다양한 등용문의 통로가 있어야 한다. 한편으로 이것은 드라마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드라마 이전에 소설과 만화, 연극 등 많은 원작이 나올 수 있는 풍토가 만들어져야 우리 드라마는 충분한 기초체력을 바탕으로 특유의 저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축구가 가능성과 저력을 보여줬듯이 우리 드라마는 이미 그 가능성을 한류로서 확인한 바 있다. 히딩크가 떠난 후 잠시 주춤했던 우리 축구는 다시 아드보카트라는 명장의 조련으로 다시 깨어나고 있다. 침체된 드라마를 되살릴 드라마의 아드보카트는 어디에 있는 걸까. 만일 그런 문화 콘텐츠가 등장한다면 한류의 붉은 물결이 ‘아시아의 호랑이’를 넘어 ‘문화 강국, 한국’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