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몽>이 아우르는 다양한 세대들
세대간의 격차는 드라마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드라마는 특정 세대를 주 시청자로 겨냥하는 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금요드라마가 중년층을 위한 드라마로 자리매김하고, 일일드라마(8시30분대)와 주말드라마가 중장년층에 주 타킷을 설정하고 있다면, 주중드라마(월화수목 10시대)는 그보다는 젊은 세대를 겨냥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건 온 가족이 모여 드라마 한 편을 함께 보는 일이 점점 없어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MBC 드라마 ‘주몽’은 예외적인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사극이라는 장르는 현대극보다는 시청자의 폭이 넓은 게 사실이지만 이 드라마는 보다 적극적으로 모든 세대의 감성을 끌어안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중ㆍ장년층 남성 - 금와의 카리스마! 난 아직 건재해!
4ㆍ50대 남성들은 드라마의 대중을 이루고 있는 멜로에 시큰둥하다. 젊은애들이 나와서 얽히고 설키는 드라마 속에서 자신이 감정이입할 대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별남별녀’같은 일일드라마가 시청률에서 수위를 가졌던 것은 바로 그 시간대의 채널권(온 가족이 모여 저녁을 먹으며 TV를 볼 때 누가 리모콘을 들고 있는가)을 가진 동년배 남성(여기서 중ㆍ장년 여성은 예외로 두자. 드라마에 익숙한 그분들은 사실상 모든 세대의 드라마를 끌어안는 힘을 갖고 있다)을 붙잡아두었기 때문이다. 일일드라마는 특정 세대가 주인공이 아니라 한 가족을 다룬다. 그 가족에는 어김없이 부모가 등장하는데, 젊은 세대들의 사랑이야기는 이 부모들의 품안에서 울고 웃는다. 주말드라마,‘소문난 칠공주’는 가부장적인 구조와 자극적인 내용으로 논란이 되었지만 역시 바로 그들의 감성을 끌어안는 모습으로 시청률이 상승하고 있다. 이런 드라마들을 보며 우리네 소외됐던 중ㆍ장년 남성분들은 안심한다. 난 아직 건재하다고!
하지만 이건 드라마를 보고는 싶지만 볼 게 별로 없는 중ㆍ장년 남성분들의 관성적인 선택이다. 그들이 사극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 안에 자신이 투사할 인물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사극에는 왕이나 그에 상응하는 카리스마가 늘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주몽’은 금와왕이라는 인물의 카리스마를 내세운다. 중ㆍ장년 남성분들은 금와왕의 말 한 마디에 음모를 꾸미던 이들이 쩔쩔매는 모습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드라마 제목이 ‘금와’가 아닌 ‘주몽’이라는 점에서 금와는 한물 지나간 사이드적인 인물이지만 카리스마는 여전하다. 그의 카리스마가 발휘하는 힘은 주인공 ‘주몽’에게 더해진다는 면에서 중ㆍ장년 남성분들은 자신의 역할에 안심한다.
중ㆍ장년층 여성 - 고전적 드라마와 유화의 모성애
이 드라마는 주몽을 중심에 두고 다루고 있지만 이 드라마의 초반부에 주를 이룬 내용은 주몽보다는 주몽 윗세대인 금와와 해모수 유화의 드라마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강력한 카리스마의 해모수와 그를 사랑하는 유화, 그리고 우정과 사랑 사이에 끼어 있는 금와. 이들이 만드는 삼각구도는 고전적이면서도 강력하다.
그 강력한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것은 모성애이다. 드라마에서의 대립은 주몽과 대소의 대결양상으로 벌어지지만 그 뒤를 보면 주몽의 모친인 유화부인과 대소의 모친인 원후(견미리 분)의 왕위쟁탈전이다. 이렇게 모성과 젊은 주인공을 연결함으로써 주몽의 성공과 패배는 유화부인에 감정이입된 중ㆍ장년층 여성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과거 수많은 사극에서 등장했던 왕후들의 세자쟁탈전은 여전히 유효하다. 음모는 모성이란 이름으로 꾸며지고 그것은 사건을 만들어내며 그 사건을 해결하면서 주인공은 점점 성장한다.
30대 남녀 - 환타지와 무협지의 감성
30대들에게 무협지와 환타지는 하나의 노스탤지어다. 암울하고 답답한 독재시절, 왜소하기만 했던 현실 속의 그들은 무협지 속에서 광활한 대륙을 날아다니는 영웅이었다. 무력이 판을 치는 남성 권위주의적 사회 속에서 그들은 아련하면서도 우아하고 환상적인 환타지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드라마 ‘주몽’은 고대사라는 사료의 부족을 오히려 상상력을 동원해 풍부하게 만들었다. 중국의 무협지보다 우리의 무협지가 더 재미있는 것은 멀리 떨어져 있고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상상력을 마음대로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주몽이 가진 무협지적 요소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해모수가 주몽에게 막힌 기를 뚫어주는 장면이라든지, 무술을 가르치는 장면은 그대로 무협지의 세계를 재현한다. 비밀감옥이라는 공간이 주는 재미는 무협지 매니아들에게는 익숙한 것이다. 또한 드라마 초반부에 나왔던 ‘다물활을 찾는 모험’은 무협지적 감성이면서 동시에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환타지모험담을 닮았다.
여기에 폭발력을 주는 것은 바로 ‘주몽’, ‘해모수’같은 역사적 인물이 그 무협지와 환타지의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무협지와 환타지 세계의 주인공은 가상의 인물인 반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역사적 영웅이라는 점에서 시청자들의 공감은 더 커진다. 역사왜곡이냐 창의적 해석이냐 논란이 많지만 역사적 인물에 무한한 힘을 제공한 것은 이 드라마가 갖는 근원적인 힘이다. 월드컵 시즌에 맞춰져 더 힘을 발한 것은 바로 그런 애국적 요소가 한층 작용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점이다.
20대 - 당차지만 나대지 않는 카리스마
‘주몽’의 캐릭터는 다른 사극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태어날 때부터 완벽한 능력치를 가진 주인공이 아닌 오히려 덜 떨어진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캐릭터이다. 많은 젊은 시청자들은 소위 말하는 ‘폼잡는’ 카리스마에 질려 있다. 그보다는 내게 친숙하고 가까운 인물에 더 쉽게 동화된다. 선망보다는 질투가 가까운 세대들이다. 자기주장이 강하기에 너무 강한 카리스마는 ‘그래 너 잘났다!’는 식으로 무시해버리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주몽의 부족하고 인간적인 캐릭터는 그들의 감성을 끌어들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물론 그 주몽의 덜 떨어진 역할이 여전히 카리스마를 잃지 않는 것은, 그 주변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해모수와 유화부인 금와왕의 보호막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몽의 연인이 되는 소서노라는 여자 캐릭터 역시 젊은 감성을 대변한다. 한 명도 아닌 두 명의 왕자 사이에서 ‘선택은 내가 한다’는 식의 당돌함은 동시대 여성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또 다른 주몽의 연인인 부용은 정반대의 역할을 해줌으로써 드라마의 균형을 맞춘다. 부용은 소서노와는 다른 운명 순응적이며 희생적인 캐릭터를 보여준다.
10대 - 게임의 감성
많은 언론에서 다루었듯이 이 드라마는 게임의 감성을 끌어안음으로써 10ㆍ20대 시청자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드라마 속의 많은 공간에서 롤 플레잉 게임 속 익숙한 장소들을 만나게 된다. 녹색의 파란 자연공간 속에 허물어지듯 앉아있는 가옥 한 채. 그리고 거기서 뛰고 차며 무술을 연마하는 주몽은 우리가 흔히 게임 속에서 말하는 ‘능력치를 올리기 위한 노가다’를 하는 공간을 닮아있다. 무기를 만드는 철기방은 게임 속에서는 대장장이를 만나는 공간이다. 거기서 게이머들은 자신이 얻어온 아이템을 팔기도 하고 새로운 아이템을 사기도 하며 무기를 다시 재정비하기도 한다. 여기에 모팔모라는 캐릭터는 게임 속 대장장이의 유쾌하면서도 엉뚱한 역할에 잘 조응한다.
두말 할 것 없이 의상은 게임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다. 롤 플레잉 게임에서 갑옷은 그 캐릭터의 능력치를 대변한다. 초기에는 누더기로 시작해서 점점 번쩍이는 갑옷으로 변해 가는 즐거움은 게임이 주는 재미 중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역사 해석의 문제가 분분하지만 한나라의 철기군 복장과 금와왕과 대장군의 눈부신 갑옷은 그 자체로 볼거리이다. 아직 장군의 즉위에 오르지 못한 주몽은 평범한 의상을 입음으로 해서 이 드라마는 많은 게이머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리모콘을 계속 고정하고 있으면 주몽은 언젠가는 더 멋진 갑옷을 입을 거라고.
모든 세대 - 삼국지적 사건과 인물의 재미
‘주몽’이 이렇듯 모든 세대를 드라마라는 하나의 용광로에 쏟아 넣을 수 있었던 것은 등장하는 많은 캐릭터들에 공을 들인 덕분이다. 우리는 ‘주몽’을 읽으며 삼국지적인 재미에 빠져든다. 주몽은 야망을 숨기고 대소 앞에 무릎을 꿇을 정도로 유비 같은 외유내강형 인물이며, 대소는 단 몇 마디의 정보를 가지고도 상대편의 정황을 읽어내며 필요하면 간교한 술수도 마다치 않는 조조 같은 인물이다.
유비가 그랬던 것처럼 주몽은 그 특유의 인간성으로 많은 인물들(협보, 오이, 마리 등등)을 끌어들인다. 그가 왕실의 자손이라는 것도 비슷하다. 대소 역시 조조처럼 많은 인물을 끌어들이나 그것은 목적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대소는 자신의 친동생인 영포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인다(이것이 앞으로 드라마 전개에 어떤 식으로 반영될 지는 의문이다). 해모수라는 캐릭터는 여러모로 보나 관우를 닮았다. 절대 카리스마와 일당 백의 정신, 게다가 죽어서까지 활약하는 인물이 해모수이다. 모팔모는 물론 장수는 아니지만 그 성격만큼은 장비를 닮았다. 이들이 엮어 가는 사건들 속에 책사들의 등장은 극의 재미를 한층 높여준다. 연타발 상단의 책사인 사용이나 부득불 같은 캐릭터는 드라마 전개에 있어 삼국지적인 긴장감과 재미를 더해준다. 현재는 부여 내에서의 암투가 대부분이지만 결국 한나라와의 일전을 남겨두고 있는 주몽에 있어 이런 재미들은 더 힘을 발할 것이 틀림없다.
주몽의 성공에는 바로 이런 모든 세대를 감싸안는 캐릭터들의 부딪침에 그 요인이 있다. 앞으로도 새로운 캐릭터들은 계속 등장할 것으로 기대되며 그것이 바로 이 드라마가 갖는 근원적인 힘이 될 것이다.
'옛글들 > 드라마 곱씹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드컵 중계방송이 시사하는 것들 (0) | 2006.07.12 |
---|---|
‘하늘이시여’,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 울었다 (0) | 2006.07.03 |
드라마, 월드컵에서 배워라 (0) | 2006.06.16 |
‘서울 1945’논쟁의 실체 (0) | 2006.06.13 |
‘어느 멋진 날’, 오빠가 돌아왔다 (0) | 2006.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