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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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나

D.H.Jung 2006. 2. 14.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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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연예비사, <왕의 남자>

연예계 뒷담화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관객 수 1천만의 흥행성공을 넘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왕의 남자>는 조선시대에 왕과 광대 사이에 벌어진 희대의 연예비사, 그것도 남성간의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 만일 동성이 아닌 이성이라면야 무치(無恥 :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로 불렸던 왕에게 이건 비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 대상이 평민이었다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시중잡배들의 ‘이 놈도 잡고 저 놈도 잡는 문고리’에 ‘이 놈도 빨고 저 놈도 빠는 술잔’인데다, ‘이 놈도 타고 저 놈도 타는 나룻배’였던 광대를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왕이 탐했다는 점에서 연예비화가 될만하다. 게다가 이 영화의 내용은 그저 만들어낸 픽션이 아니다. 물론 많은 각색이 들어갔지만 역사적 사실들에 상당부분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5백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역사는 재해석이라고 하지 않는가.

자유분방한 대통령과 함량 미달의 정치인들
연산군의 비화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87년에 박종화의 <금삼의 피>를 각색해 만들어진 <연산군>은 당대의 섹스심벌이었던 이대근이 연산군으로, 그리고 강수연이 장녹수로 출연한 영화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과거의 우리의 눈과 귀를 먹게 했던 에로영화의 코드를 그대로 가져왔다. 하지만 불과 1년 후인 1988년 임권택 감독이 만들고 유인촌이 연산군으로 출연한 <연산일기>는 보다 연산군 자체의 인간적 측면에 닿아있다. 이 영화에서 연산군은 죽은 폐비 윤씨에 대한 마더콤플렉스를 가진 인물로 폭군이 될 수밖에 없었던(그의 폭행을 정신착란에 의한 것으로 해석) 면을 강조한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소재의 영화가 이렇게 다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역사적으로는 87년 6.10 민주항쟁에서 6.29 항복선언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 속에서 과거의 잔재와 변화하려는 자유에 대한 의지가 공존했던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 같다.
현재에 만들어진 <왕의 남자> 역시 그 시대상을 빗겨갈 수는 없다. 영화가 신드롬이 되다보니 그 신드롬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이 영화적 상황을 현실에 빗대 이야기하면서 이런 부분을 조장한 것이 사실이다. 연산군이 공길에게 중신들의 반대에도 종4품의 벼슬을 주었다는 것을 최근의 노무현 대통령이 당 안팎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시민 의원을 보건복지부 장관에 내정한 것에 빗대 말하기도 하고, 연산군이 ‘내가 왕이 맞느냐’고 하는 말을 노무현 대통령의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발언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광대들을 끌어들여 정적을 제거하는 연산군의 모습을 두고, 어떤 정치인은 인터넷을 동원해 여론몰이를 하거나 새로운 세력을 만들어내는 노 대통령을 닮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 위기 때마다 그걸 뒤집는 장생의 언변으로 시골 마을에서 한양으로 한양에서 궁궐로 가는 장생의 입신 역시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들이다.
물론 <왕의 남자>의 감독이 이걸 의도했는지 안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적어도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유분방하면서 탄핵까지 받을 정도로 힘이 약한 대통령과, 그렇다고 대통령을 욕할 버젓한 자격이 있는 정치인도 없는 답답한 현실이 반영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조선시대 개그맨, 정치코미디의 재미
답답한 현실, 이제 그 마이크는 당대의 개그맨이었던, 광대가 잡는다. 장생(감우성 분)은 조선시대 김형곤 같은 정치코미디의 일인자였던 것 같다. 민중들의 애환을 속 시원히 풀어주던 당대의 연예인들, 연희패들은 오늘날의 연예인들보다는 더 자유로울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TV라는 매체는 파급력이 좋은 반면, 통제하기도 쉬운 법이다.
강력한 왕권 하에서도 연희패들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질펀한 농담을 풀어놓는데, 그 내용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과 풍자가 당연했다. <왕의 남자>의 도입부에서 줄타기를 하며 나누는 장생과 공길의 대화는 성적인 농담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당대의 연예인들인 광대들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기예를 팔고 몸을 파는 것이 일이었다. 이것은 당대 여사당(女社堂)이 받는 돈을 화대(花代)라고 불렀던 것만 봐도 쉬 알 수 있는 일이다. 자신들의 이런 처지를 웃음으로 돌려 풍자하던 장생은 이제 그 말의 칼날을 정치인들을 향해 든다. 그는 왕이 기생의 치마폭에 둘러싸여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밝히는 건 왕이나 벼슬아치나 평민들이나 다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한다. 그는 왕과 녹수의 애정행각을 빗댄 정치코미디를 시작하고 이건 공공연한 소문을 눈앞의 현실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어느 정치인이 어느 연예인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인터넷 입소문 만큼 빠르게 전파된다. 민중들은 이 놀이판에서 장생과 공길을 통해 왕과 녹수의 비밀스런 침소를 엿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왕을 잡놈이라 했더니 좋아하더라
어떤 연예인은 대머리에 용모가 비슷하다 하여 집권기간 내내 방송출연을 못했던 사람도 있는 마당에, 강력한 왕권통치의 조선시대에 왕을 빗댄 정치코미디가 성했을 리 없다. 의금부로 압송된 장생은 그러나 또 한번의 당찬 발언으로 궁궐로 들어가는 영광을 얻는다. 그것은 ‘왕을 웃기면 왕을 모욕한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묘한 논리에 근거해 있다.
사실 장생 조차도 왕이 웃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연희마당으로 나서면서 ‘어차피 살 판 아니면 죽을 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천상천하의 왕을 잡놈으로 치부하면서 ‘윗 입을 주랴, 아랫입을 주랴’하는 질문에 점잖은 체, 왕을 빗댄 연기를 하던 장생이 ‘윗 입’을 달라고 하자, 그 뜻을 알아차린 녹수 연기를 하던 공길이 ‘물구나무를 서며 윗 입 대령이오’라는 말에 왕은 웃음을 터뜨린다. 왕은 공감했던 것이다. 중신들 모두 법도니 뭐니 하며 윗 입 타령을 하지만 사실은 다들 아랫입을 탐하던 것을 알았던 왕은 공길의 물구나무에서 중신들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읽어낸 것이다. 그런데 그것뿐이 아니다. 사실은 그 윗 입 아랫 입 퍼포먼스에 등장한 비판의 대상에는 중신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왕 또한 포함된다. 왕은 그 위선적인 법도를 벗어나려는 자학적인 잡놈 행세를 했던 것이고, 이들의 퍼포먼스를 보며, 이들이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켰을 것이었다. ‘너도 광대이고 나도 허수아비 광대’라고 말하는 왕은 왕이 싫었고, 궁궐을 벗어나 잡놈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왕은 광대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중독되게 되고 그들의 퍼포먼스를 통해 세상을 보게 된다. 연희 속의 환상은 왕에게 현실이 되어버린다.

왕의 환타지 속에서 살고 죽고
왕을 농락하는 광대들을 비판하는 중신들로 인해 왕은 더더욱 광대들에게 고착된다. 이제 왕은 광대들을 자기동일시 하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광대들이 왕과 조우하면서 그 가려운 부분을 긁어준다. 중신들을 갖고 노는 것이다. 그러자 왕은 이 놀이판을 현실로 바꾸면서 중신들을 향해 칼을 휘두른다. 한편 녹수와는 달리, 진정으로 왕을 이해하게 된 공길은 폐비 윤씨의 사건을 재현해내고 이 과정에서 왕은 선왕의 여자들을 살해한다. 왕은 장생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자신 속의 강한 왕(선왕)과 동일시하며, 공길을 자신의 어머니와 동일시한다. 그러자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왕은 어머니를 사랑하듯 공길을 사랑하지만, 선왕만을 받들고 죽게 됐던 어머니처럼 공길 역시 장생만을 따른다. 왕은 어린 시절로 퇴행한다.
왕의 환상 속에서 장생은 아버지, 선왕이며, 왕은 어린 시절로 퇴행한 자신이고, 공길은 연산의 어머니가 된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모는 아버지와 어쩔 수 없는 어린 자신의 상황을 다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장생이 연산에게 한 “어느 잡놈이 그 놈 마음 훔쳐 가는 걸 못 보고...”라는 말에, 공길이 “야 이 잡놈아! 거기가 어디라도 올라가느냐!”라고 하며 그 잡놈이 장생이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 장생은 미소짓고 있었고, 연산은 살의를 느꼈다. 질투에 불타는 왕은 장생의 눈을 지지는데, 눈을 지지는 이 모티브는 여러모로 보나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왕>에서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죽게 한 오이디푸스왕이 스스로 눈을 멀게 하는 장면과 맞닿아 있다.

눈 먼 개그맨, 세상이 보이다
눈이 먼 장생은 이제 눈뜬 장님으로 살던 시절을 본다. 자신이 사랑해왔던 공길을 본다. 자신이 살아왔던 길이 사실은 살 판이 아닌 외줄에 가까스로 의지한 죽을 판이었다는 것을 본다. 살기 위해 자유의지를 꺾었던 자신을 본다. 그러나 그 외줄 위에 서는 그 짧은 순간만이 자신이 왕보다 무엇하나 부러울 것 없던 자유인이었던 것을 알게된다. 그 줄 위에서 다시 태어나도 광대가 되겠다는 선언을 한 두 사람은 높이 하늘 위로 솟아오른다. 그 하늘에 붙박여 정지된 장면 속에서 장생의 손에 삶의 지긋지긋한 애착처럼 꼭 쥐여있던 부채는 놓여진다.
연산은 자신이 스스로 허수아비 광대였다는 것을 알게된다. 마치 사이코드라마처럼 자신을 상처 주었던 선왕을 눈멀게 한 연산은, 이제 어머니가 따르던 선왕과, 어머니의 외줄타기 사랑(왕이라는 굴레 속에서)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짓는다.

웃음 뒤의 또 다른 얼굴, 개그맨과 정치인
<왕의 남자>는 마치 개그콘서트 류의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는 것만 같다. 조선시대의 광대들은 각종 기예와 웃음들을 갖고 궁궐로 찾아들어 경연을 벌인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재미는 바로 이 조선시대에 벌어진 개그콘서트를 보는 것이다. 대표적인 조선시대 유랑연예인집단인 남사당의 연희 종목인 풍물(농악), 버나(대접 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꼭두각시놀음) 같은 놀이들이 질펀한 개그와 곁들여지니 눈이 즐겁고 귀가 즐겁다.
그런데 그 웃음 뒤에는 또 다른 얼굴들이 있다. 자신의 고통이나 신체적 장애까지 이용해 사람들을 웃기는 개그맨들의 애환이다. 그래서 개그맨들의 웃는 모습을 조금 다른 각도로 보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다. 저들은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네와 똑같이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을 텐데 그래도 우리에게 웃음을 주는구나, 하는 감회에 젖게된다. 하지만 그것과는 정반대의 얼굴도 있다. 부도덕한 정치인의 얼굴이다. 그들의 웃는 얼굴, 혹은 감정을 보이지 않는 포커페이스 뒤에는 뭔가 뒤틀리고 꼬인 실타래 같은 욕망이 숨어 있다. 가장 높은 곳에서 말 몇 마디로 욕망을 채우려는 부정한 정치인의 이미지들이다.
개그맨이나 정치인이나 둘 다 입으로 먹고산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지향하는 바는 이렇게 다르다. 가장 낮은 입이 가장 높은 입과 한판 걸판지게 붙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가십거리의 연예 비사를 뛰어넘어 억눌린 민중의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저 윗분들의 잘못 이면에 대한 이해 또한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 소비계층의 폭을 대폭 넓혀놓았다. 그러나 이 양극점의 해소는 저 외줄을 타고 있는 장생, 공길과, 녹수를 끼고 높은 곳에 앉아 외줄타기를 보고 있는 연산의 거리만큼 멀다. 다만 그것을 가깝게 하는 것은 연산에 반기를 든 세력들에 의해 연산 또한 같은 운명을 갈 것이라는 예감이다. 높은 놈이나 낮은 놈이나 어차피 가는 것이고, 그러니 이 한 판 자유롭게 살다 가는 게 낫지 않는가. 영화는 ‘자유로운 잡놈’과 ‘자유 없는 왕’이라는 두 측면에서 균형을 잡으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