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콘> 횃불 투게더, 소시민적 분노에 대한 일침
<개그콘서트>의 ‘횃불 투게더’는 꽤 논쟁적인 개그 코너가 아닐 수 없다. 눅눅한 치킨을 참을 수 없다며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투쟁’에 나서는 청년들. 치킨무를 공짜로 줄 수 없다는 주인아주머니에게 치킨에 빨간 양념을 찍어 마치 횃불을 들 듯 들고 일어나 “치킨무를 달라!”고 왜치는 청년들.
'개그콘서트(사진출처:KIBS)'
‘투쟁’이라는 풍경이 환기시키는 건 삶의 터전을 잃은 서민들의 절절함이다. 길거리에서, 공장에서 우리는 이 풍경을 꽤 오랫동안 봐왔다. 만일 그 투쟁에 나서는 서민들의 절절함을 피부로 그대로 느끼는 분들이라면 이러한 투쟁 자체가 어찌 보면 약간 희화화되어 있는 ‘횃불 투게더’가 자못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개그라는 한 장르를 너무 폄하하거나 혹은 ‘투쟁’이라는 현실적 사안의 무게감에 짓눌려 도무지 여유를 가질 수 없는 현실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개그는 어떤 소재든 가져올 수 있다. 중요한 건 ‘횃불 투게더’가 과연 그 절절한 투쟁의 현장을 희화화시킨 것인가 아니면 그 이면에 담겨진 무언가를 풍자한 것인가 하는 점일 게다.
‘횃불 투게더’는 그래서 논쟁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 안에는 의외로 중요한 풍자적인 면면들이 발견된다. 즉 이렇게 ‘횃불’이 개그의 소재로까지 올라온다는 건 그것이 얼마나 비일비재한 상황인가를 잘 말해주기도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너무나 쉽게 이 투쟁의 풍경들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일상적인 풍경의 하나처럼 지나치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됐다.
너무 많은 것은 오히려 그 본질을 가린다. 즉 횃불의 일상화는 그 사안들의 중대함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것은 횃불을 드는 사람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이런 일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늘 묻혀짐으로써 결코 바뀌지 않는 세상에 대한 일종의 포기 같은 것이 공기처럼 자리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공고한 시스템은 횃불의 일상화를 그런 식으로 포장해버린다.
건수만 나오면 횃불을 드는 ‘횃불 투게더’는 이 일상화의 풍경 속에 묻혀버린 우리네 소시민적 투쟁의 씁쓸함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분노의 정체가 저 거대한 시스템의 부조리에서 비롯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목도해온 우리네 서민들의 투쟁의 방향이 너무나 소소하고 사소한 일로 틀어져 있다는 이 코너의 메시지다.
세상에는 바싹한 치킨을 원하는 일보다, 치킨무를 더 많이 공짜로 얻어먹는 일보다 더 중대한 사안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중대한 사안들에는 결코 횃불을 들지 않는다. 그러니 이 엄한 일에 과도한 리액션을 취하는 ‘횃불 투게더’가 만들어내는 웃음은 결코 폭소가 되지 못한다. 거기에는 웃픈 현실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왜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게 된 것일까. 왜 그리고 저들은 저렇게 술집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걸까. 왜 저들을 힘겹게 만든 현실과 마주하지 않고, 음식점 아주머니 같은 똑같이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 이들끼리 대결하고 있는 걸까. ‘횃불 투게더’는 그저 웃고 넘기기에는 참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드는 코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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