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열한 거리>에 드러난 시스템의 문제
조폭이라는 코드가 주는 드라마틱한 이야기 속에는 강한 사회성이 들어있다. 장현수 감독의 ‘게임의 법칙’,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 송능한 감독의 ‘넘버3’ 모두 조폭을 다루고 있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사회의 구조를 발견한다. 그것은 권력의 문제이고 경제의 법칙이면서 결국 사회라는 시스템이 움직이는 법칙이다. 그러므로 조폭 영화는 사실상 액션도 아니고, 드라마도 아닌 사회극에 가깝다.
그렇다면 유하가 건드린 사회의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조폭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폭력의 현실과 바로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시스템의 권력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그 권력자들은 소위 경제인으로도 불리고, 지식인으로도 불리는 이들이다.
학생신분에서 비열한 거리로 나온 이야기
‘비열한 거리’를 ‘말죽거리 잔혹사’의 연장선상으로 보는 것은 그것이 다시 폭력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유하라는 감독의 작품이 성장기를 겪고 있다면, ‘비열한 거리’는 학생신분에서 성인으로 가는 그 지난한 성장과정을 보여준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무채색이었지만 그래도 낭만적이었던 ‘로미오와 줄리엣’과 ‘이소룡의 영화들’이 있었다면, ‘비열한 거리’는 칼라를 얻었으나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동명의 영화와, 많은 ‘게임의 규칙’류의 영화들처럼 처절해진다. 학생신분에서는 감성적으로 부딪치던 것이 이제 사회로 나오자 보다 분석적이 된다.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은 ‘이 갈리는 비열함에 대한 증오’로 바뀐다. ‘증상으로 나타난 폭력’은 ‘소비되는 폭력’으로 구체화된다. 영화는 폭력이 소비되는 시스템을 건드린다.
자기를 부정하게 만드는 시스템
사회가 폭력을 소비하는 시스템은 황 회장 역으로 새로운 면모를 보인 천호진과, 극중 병두로 분해 자신 앞에 놓인 두 세계(폭력의 세계와 평범한 일상)를 잘 소화해낸 조인성, 그리고 종수역을 맡아 칼날 같으면서도 동시에 마음 약한 면모를 보여주는 내면연기를 펼친 진구가 수직적인 축을 이룬다. 거기에 조인성을 중심으로 욕망과 우정 사이에 분열되는 영화감독 역의 민호역의 남궁민, 그리고 조인성의 폭력성을 혐오하면서도 그의 가녀린 면을 사랑하게 되는 현주역의 이보영이 수평적인 축을 이룬다.
영화는 이 수직적인 축과 수평적인 축을 오가면서 일상과 비일상, 평범과 비범, 폭력과 안전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고 아주 가까이서 서로 침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조인성은 다양한 세상사의 이야기를 묶어두기에 적합한 캐릭터이다. 그는 가녀린 슬픈 눈빛과 강렬하고 광적인 눈빛을 동시에 보여주는 연기로, 때로는 잔혹함에 인상을 찌푸리게 하다가도 때로는 동정심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황 회장은 사실상 아버지가 없는 병두의 대부격이다. 학생신분을 벗어나 거리에 나온 병두를 어른으로 조련하는 것은 황 회장이다. 황 회장은 병두에게 시스템의 법칙을 말해준다. 그것은 “내가 얻고 싶은 것과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 얘기를 통해 병두는 어른의 세계, 즉 비열한 거리에 세워진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겪어야 하는 통과제의가 있다. 그것은 황 회장을 괴롭히는 검사와, 자신과 함께 커온 중간보스 상철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러면서 병두는 시스템의 법칙을 따라간다. 그런데 이 시스템 속에는 놀라운 자기부정이 숨어있다. 상철의 말 한 마디에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었던 병두가 시스템에 편입되기 위해 죽인 건 바로 상철이었던 것이다. 이 말은 언젠가 그 칼날이 자신에게 날아올 것이라는 걸 시스템에 들어가는 순간 인정한다는 얘기가 된다.
누가 마지막에 살아남는가
이것은 단지 병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시스템 속에 있는 황 회장도 마찬가지고, 병두의 오른팔인 진구에게도 마찬가지 얘기다. 시스템은 인격이 없고 단지 비정한 법칙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그 불안한 시스템 속에서 그들의 자아는 모두 분열되어 있다. 황 회장은 병두의 아버지 같은 자상함을 갖고 있으면서도 병두를 죽음으로 내모는 인물이고, 진구는 병두의 말 한 마디에 죽음도 불사하는 형제 같은 인물이지만 그걸 배신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는 ‘라스트맨 스탠딩’ 스토리로 흘러간다. 이 영화에서 반복되는 룸싸롱 신은 “누가 마지막 노래를 할 것인가”를 보여준다. 처음 노래를 했던 이는 중간 보스였던 상철이고, 그 다음에는 병두가 노래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황 회장이 마이크를 잡는다. 그는 마치 참회하듯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Old And Wise’를 부른다. 그 노래를 부르면서 황 회장 스스로도 자신이 ‘라스트맨’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수평에서 수직으로 오르는 욕망 그리고 순수
반면 수평적인 틀 안에서 친구로서 다가온 영화감독 민호는 친구와의 우정과, 영화감독으로서의 성공에 대한 욕망 사이에 갈등하는 인물이다. 조폭 영화를 만들기 위해 취재를 하면서 병두와 민호는 점점 가까워진다. 재미있는 것은 가까워지면서 병두는 점점 민호와 가졌었던 우정, 의리 같은 순수의 세계, 수평의 세계로 점점 다가가는 반면, 민호는 병두가 가진 수직의 세계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영화촬영장을 찾아온 병두는 민호에게 “의리가 뭔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영화”를 찍어달라고 하지만 결국 민호가 찍은 영화는 의리를 배반하는 영화가 된다. 이것은 마치 병두가 자신의 입지를 세우기 위해 치렀던 통과제의, 자신의 중간보스 상철을 제거한 것과 똑같은 사건으로 이를 통해 민호는 시스템 속으로 들어온다.
순수를 지키고 항상 수평적인 위치에 서 있는 이는 병두의 사랑, 현주 뿐이다. 그녀를 위해 병두는 모든 걸 다 버릴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병두가 수직적인 시스템의 희생양이 된 것은 그가 가진 이런 순진하고 순수한 구석 때문이다. 어제의 형제를 오늘 땅에 묻는 시스템에서 진정한 관계는 용납되지 않는다.
욕망을 위해 폭력을 소비하는 사회
영화는 이 사회의 욕망을 쟁취하려는 군상들과 그걸 얻기 위해 소비되는 폭력의 시스템을 다룬다. 기존의 조폭영화와 이 영화가 다른 점은 이 시스템 속에 지식인을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병두가 처한 조폭의 시스템과 민호가 처한 영화 제작 시스템은 거의 동격이다.
친구와의 의리를 배신하고 친구를 희생시키면서 그가 편입된 시스템은 조폭의 시스템이 아니라 영화 제작의 시스템이다. 결국 따지고 보면 민호와 병두는 성질만 다를 뿐, 같은 시스템 안에 있었던 것이다. 병두를 희생시킨 후의 민호의 성공이 불안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조폭이 소비되는 것처럼 영화감독 역시 소비된다.
비열한 거리는 바로 여기 있다
유하 감독의 자기부정은 처절하다. 굳이 영화감독을 작중 인물로 끌어들여 자의식 과잉이라거나 먹물냄새가 난다는 등의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이 영화는 하나의 퍼포먼스가 되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흔히 말하는 ‘조폭영화’의 스릴을 만끽한다. 진흙탕 격투 신은 그 백미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관객을 조폭영화의 틀 속으로 끌어들인 연후에, 민호라는 영화감독을 통해 그 틀을 넘어서 버린다. 여기서 우리는 좀더 비판적 거리를 두고 폭력에 열광했던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감독의 자기부정은 관객의 자기부정으로 전염된다.
마지막 장면, 황 회장이 주관하는 자리에 민호와 종수가 함께 술을 나누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모두 시스템 속에서 살아남아 있는 자들이지만 언제 희생될지 알 수 없는 인물들이다. 그 불안한 눈빛들 속에서 그들은 술을 나누고 노래를 부른다. 그 장면이 평범한 일상을 사는 샐러리맨들의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역시 그 시스템 속에서 늘 불안한 눈빛들을 나누며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장면 속에 조폭이라는 미지의 세계가 아닌 영화감독이라는 친밀한 세계를 끌어들임으로써 영화의 의미는 좀더 확장된다.
‘비열한 거리’는 저 베일에 싸인 조폭의 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조폭을 다루는 영화 속의 이야기만도 아니다. 우리는 늘 집을 나서면서 시스템이 지배하는 수직적인 세계에 직면하고 집으로 돌아와 수평적인 세계 속에서 살아있음에 안도한다. 일상의 평범을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수직적 세계에 대한 욕망을 불태운다. 시스템은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희생을 감수하는 순간, 자신도 그 시스템의 법칙에 따라 희생될 거라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된다.
바로 여기 우리가 서 있는 이 곳이 비열한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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