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이 재난영화처럼 보이는 이유
개봉 전부터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그 영화가 베일을 벗었다. 괴물의 모습이 궁금한 것은 당연지사. 고질라 만큼 거대하지도 않고, 에일리언처럼 작지도 않은 그저 아담한 크기의 괴물은 무엇이든 삼켜버릴 수 있는 거대한 입과, 손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꼬리 그리고 뒤뚱뒤뚱 걸어갈 때나 사용될 법한 다리가 위협적일 뿐이다. 심지어 축축하게 젖은 눈과 조그마한 공간에 벽을 보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은 슬퍼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이것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얘기다.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그 모습은 관객들을 공포와 경악으로 몰고 가는 영락없는 괴물의 모습으로 돌변한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긴장 속에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영화가 끝나고 나면 괴물의 정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 불쌍한 괴물을 괴물답게(?) 만든 것은 사실 괴물 그 자신이 아니고, 괴물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봉준호 감독은 장르를 잘 활용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잘 활용한다는 것은 장르가 가진 속성을 이용해서 그 장르를 파괴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으 통해 전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편의적으로 괴물을 구분한다면 어떤 장르가 적합할까. 괴물이 나왔으니 에일리언이니 고질라, 프레데터 등등의 괴수영화의 한 부류로 봐야 할까. 그러나 영화는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영화는 블랙코미디, 가족극, 정치극 등등 수많은 요소들을 끌어안고 있다.
아마도 이 영화가 칸느에서 상영되었을 때, 그것을 본 전 세계인들은 괴물에 저마다의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괴물이 단순히 서스펜스와 스릴러, 공포를 곁들인 영화라면 불가능했을 이 의미부여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괴물이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 상징은 전쟁이 되기도 하고, 폭력이 되기도 하며, 부패한 권력이 되기도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상영되고 있는 괴물이 재난영화처럼 보이는 것은 당장 수해로 인해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괴물의 영화 속 상황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수마가 할퀴고 간 도로는 마치 엿가락처럼 휘어있고, 자식처럼 키웠던 작물들은 하룻밤 새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전기가 나가더니 벽이 무너지면서 토사가 집안으로 쓸려 내려왔다. 어제까지 함께 웃고 얘기하던 아들, 딸들은 강물처럼 도로를 질주하는 빗물에 쓸려 사라졌다. 몇 년 전 똑같은 수해를 입은 주민들은 당시 제대로 예방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다. 한번의 재해는 자연재해라고 해도 연달아 벌어지는 재해는 인재가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수해처럼 괴물은 대낮에 버젓이 한가로운 한강변을 습격했다. 사람들은 밟히고 찢겨지고 잡아먹혔다. 그 가운데 우리의 소시민 박강두네 가족이 있었다. 강두는 자신의 눈에 집어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현서를 괴물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합동분향소에서 오열하는 사람들이 직면한 것은 바이러스 감염이 두려워 행해지는 격리조치이다. 저 많은 헐리우드 괴수영화들이 보여주려는 것처럼 괴물이라는 재해(물론 괴물은 탄생부터가 환경오염으로 인한 인재이다)와 그에 대한 대결은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이 재해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재해에 대한 대처는 미온적이거나 정치적이다. 실제 괴물을 찾아 나서거나 해치워야할 군 병력들은 오히려 사람들의 현장접근을 막기 위해 동원된다. 괴물의 실체는 분명 있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것이 가져올 사회적 파장이다. 그래서 그들이 취하는 제스추어는 있지도 않은 바이러스라는 새로운 공포를 주입하는 것이다. 박강두 가족은 괴물보다, 먼저 사건을 축소 왜곡하려는 정부와 맞닥뜨리게 된다. 이렇게 재해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하는 동안에도 괴물은 한강변에 출몰하며 또 다른 재해를 일으킨다. 기물은 파괴되고 사람들은 죽어나간다.
이들 괴물과 싸우는 소시민, 박강두네 가족의 이야기는, 최근 피해가 가장 심했던 인제 지역에 나타난 8명의 산악인을 연상시킨다. 당시 고립된 주민들은 헬기를 보내달라고 했지만 비 때문에 헬기는 뜰 수 없었다. 도저히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길을 뚫고 들어온 산악인 8명은 2박3일 동안 무려 50여 명의 주민들을 구하고 영웅 대접하는 주민들에게 오히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일상생활로 돌아갔다고 한다.
영화 속 박강두 가족이 괴물과 싸우는 이유 역시 소시민에 무슨 영웅이 되고 싶어하는 일이 아니다. 단지 자신들의 손주이자, 딸이자, 조카가 괴물에게 잡혀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소시민들은 도대체 무얼 갖고 싸울 것인가. 저 산악인들이 자신들이 평소 쓰던 등산장비를 사용했던 것처럼(어떨 때는 이것이 헬기보다 더 유용하다) 가족들이 사용하는 무기도 그런 것들이다.
그것은 돈을 주고 구입한 총은 예비군 훈련장에도 사용하지 않을 것 같은 낡은 총이며, 양궁선수로 등장하는 박남주(배두나 분)가 쓰는 활, 그리고 운동권 출신이었던 박남일(박해일 분)이 사용하는 화염병이다. 이걸로 어떻게 괴물을 이기겠나 싶다. 그런데도 이 무기들은 괴물과의 사투에 아주 유용하다. 사실은 괴물 자체가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로써 결국 박강두 가족이 싸워야 했던 것의 실체가 드러난다. 탱크 한 대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정부와 해결책을 주는 듯 접근해 괜한 내정간섭과 실험만 일삼는 미국이 그들이 싸웠던 진짜 괴물이었던 것이다.
영화는 수많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비춰낸다. 현장에 들어가기 위해 공무원에게 돈을 집어줘야 하는 상황이라든지, 격리되어 있는 병원에서 이유도 말하지 않고 검사를 해야하니 아무 것도 먹지 말라는 모습이라든지, 조사랍시고 행해지는 고문이라든지, 휴대폰 강국에 맞게 괴물의 은신처에서 제대로 된 휴대폰을 기다리는 현서나 통신회사에 있는 친구 빽으로 통화기록을 빼내는 장면 등등... ‘괴물’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기에 이런 장면들이 정작 괴물보다 더 많이 등장하는 면면을 보면서 관객들은 진짜 괴물을 보는 듯한 묘한 카타르시스를 얻기도 했을 것이다.
최근 반환된 미군기지의 심각한 오염 사태 또한 영화 속 괴물의 탄생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미8군에서 버린 맹독성 포르말린이 한강으로 스며들면서 탄생하는 괴물처럼, 사건은 이미 터졌거나 진행중이지만 이에 대한 대처는 항상 뒷전이다. 백화점이 무너지고, 다리가 무너지고, 가스가 폭발하는 재난의 발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잉태되어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재난이 터졌을 때, 이 땅의 정치인들은 어떻게 대처했던가. 혹여 사태를 축소하거나 오히려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는 않았던가. 봉준호 감독의 작은 ‘괴물’이 더 무섭고, 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우리 사회라는 한강에서 잉태되고 있는 괴물의 존재 때문이다. 이것은 저 영화 속 괴물처럼 가상이 아니고,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몸서리쳐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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