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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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 컨츄리>나 사우스 컨츄리나

D.H.Jung 2006. 5. 17.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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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 컨츄리>와 박계동 동영상

고급요정에 기자와 정치인들이 합석했다. 폭탄주가 왔다갔다하는 와중에 실수인지 정치인 한 분이 여기자를 성추행 했다. 사건이 터지자 그 정치인은 식당 주인인줄 알았다고 했다. 그 말은 식당 주인이라면 성추행해도 된다는 말이기도 했다. 이렇게 한나라당 최연희 의원 성추행사건은 시작됐다.

최연희 야설과 박계동 야동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잊는다던가. 여기자 성추행으로 한바탕 사회적 물의를 빚었던 최연희 의원 사건은 정몽구 회장 비자금 사건으로 덮어지면서 대중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져갔다(사실 정몽구 회장 사건 역시 삼성의 문제를 덮어준 것이나 마찬가지!). 그러던 중 ‘금요일밤의 은밀한 소환’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게됐다. 내용인즉슨, 하필이면 국민의 관심이 온통 정몽구 회장의 구속영장 발부여부에 쏠려있던 4월28일 검찰이 최 의원을 소환해서 2∼3시간 조사한 뒤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검찰출신인 최 의원의 조사에 있어 검찰이 언론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따돌렸다는 얘기다.

최연희 의원을 두둔하는 이야기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한나라당 이계진 대변인은 스스로 사퇴권고결의안에 기권했다고 밝혔다. 이유는 같은 강원도 출신이기 때문이란다. 이 말은 같은 지역 출신이라면 뭘 해도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안상수 인천시장 후보는 최연희 의원의 행동이 여기자와 친해지려는 것이었는데 언론이 호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여기자와 친해지려면 성추행을 해도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놀라운 것은 최연희 의원을 옹호했던 인사들이 그의 영향력이 막강한 강원도 지역 비례 대표로 공천되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민중의 소리> 동영상에는 최 의원의 사무실을 방문해 사퇴반대서명용지를 받아간 사람들(그들 중 다수가 공천되었다)이 등장한다. 놀라운 것은 그 사람들 중에 성추행 사건에 민감해야할 한 여성 후보가 외치는 소리이다. “××차고 못 만지면 병신이지!”

그런데 최연희 의원의 야설이 여전히 귓가에 쟁쟁한 그 때, 때아닌 야동이 인터넷을 뒤덮었다. 약간 어두운 조명 속에 한 점잖은 분(?)이 여급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의 가슴을 파헤친다. 카메라는 대담하게 그 분의 얼굴을 향해 있고, 그 분은 카메라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듯 거침없이 여자의 가슴속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요즘 장안을 술렁이게 만든 동영상치고는 건전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문제의 동영상. 어떤 이들은 뭐 그렇게 시시한 걸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냐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분이다. 그 분은 한때 어느 행사장에서 자신을 홀대했다는 이유로 뒷풀이 자리에서 거침없이 맥주를 상대에서 쏟은 전력을 가졌을 정도로 박력있는 박계동 의원이었다. 영웅은 호색이라 그것도 술집에서 여급을 끼고 술 한 잔 마신 게 뭐 대수냐고 하는 분들 많겠다. 그런데 신문지면에서는 이 사건을 이렇게 부른다. ‘박계동 성추행 동영상 파문.’ 이 사건이 성추행인지 추태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여전히 국회의원들이 잘못된 성 의식과 남성주의 술 문화에 젖어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스 컨츄리나 사우스 컨츄리나
이 정도 되면 한나라당은 성추행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왜 같은 국회의원들이면서 유독 한나라당만 이런 성추행 파문이 도는 걸까.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과연 절대로 룸싸롱 같은데 출입하지 않고 서민적인 삼겹살집에만 갈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한나라당이 상대적으로 오랜 세월동안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관성적으로 배어온 습관들이 열린우리당보다는 많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 관성적인 술자리와 성 의식은 이제 죄의식조차 마모시킬 정도가 된 건 아닐까. 상식적으로 ‘여기자를 성추행하는 국회의원’이 말이 되는가.

문득 영화 <노스 컨츄리>가 떠오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노스 컨츄리나 사우스 컨츄리나 비슷하구만.’ <노스 컨츄리>라는 영화를 보면서 내내 남자라는 것이 불쾌할 정도로 참담한 심정이었다. 1984년 미국에서의 최초의 직장 내 성폭력 승소 사건인 ‘젠슨 대 에벨레스 광산 사건’을 영화화한 <노스 컨츄리>. 하지만 답답한 현실은 지금 이 땅에서는 <노스 컨츄리>의 사건이 여전히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불황과 굴욕적인 삶들
윗물이 저러할진대 아랫물은 오죽할까. 인터넷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성추행’이라고 쳐보면 안다. 지금 이 나라가 얼마나 미쳐 돌아가고 있는지를. 또한 이것은 거꾸로 말해준다.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굴욕적인 삶을 참아내고 있는가를. 직장내 성희롱에 대한 법정투쟁드라마로 실제 사건을 영화화한 <노스 컨츄리>가 지금 이 땅에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뛰쳐나온 조시. 그녀 앞에 놓인 상황은 절망적이다. 두 아이들의 양육을 위해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으로 생각되던 광산 일을 하게 되는 조시는 힘겹지만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녀를 힘들게 하는 것은 고된 광산의 노동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 광부들을 대하는 남성 동료들의 집단적인 성추행이다. 많은 광산이 문을 닫아 대량실업사태가 벌어지던 1980년대, 남성 동료들은 여성 광부들을 동료가 아닌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적으로 간주했다. 그들에게 수치심을 유발하게 하여 스스로 떠나게 만들려는 심산이었다. 조시는 여기에 반기를 든다. 그러자 남성 동료들의 성추행은 점점 심해지고 다른 여성 광부들까지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굴욕을 선택한다.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뼈아픈 기억이 있다. IMF 시절 한 상담소에서는 고용불안을 악용한 직장 내의 성추행 상담이 크게 증가했다고 한다. 이것은 그 때 당시 갑자기 성추행이 늘어났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전에는 성추행을 저지르는 상사나 동료가 있다면 직장을 옮기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지만, 고용불안이 심해지자 굴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직장을 고수했던 여성들이 많이 늘었다는 것이다.

사실 직장 내의 굴욕적인 생활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물론 많은 직장들이 민주적인 형태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그렇지 않은 곳들이 즐비하다. 성희롱이나 성추행의 문제는 단순히 남성 여성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권력의 문제이며 이에 대한 투쟁은 굴욕적인 삶을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권력에 맛을 들인 일부 직장상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일상화된 언어폭력, 혹은 직접적인 폭력에 무릎꿇고 살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다. 그러므로 <노스 컨츄리>가 던지는 성추행의 문제는 여성의 문제로만 볼 수 없고, 모든 권력의 상하관계 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해당되는 문제가 된다.

그래도 <노스 컨츄리>는 순진하다
굴욕적인 삶이냐 투쟁이냐의 기로에서 투쟁을 선택한 조시는 법정에 서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지지해주는 단 한 명의 여성동료도 만들지 못한다. 대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가족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노조원들의 빗발치는 조롱 속에서 당당하게 말한다. 여러분들은 모두 내 형제 자매이고, 지금 당신들이 조롱하는 저 여자는 바로 내 딸이라고. 그 사실이 부끄럽다고. 여기서 부끄럽지 않은 건 내 딸뿐이라고.

자신이 희롱했던 한 여자가 내 가족이고 내 딸이라는 인식은 사람들을 바꾸어놓기에 충분하다. 우리네 직장내 성희롱 역시 이런 인식의 전환으로 어느 정도는 해결되지 않을까? 글쎄 의문이다. 한번 실수는 할 수 있다지만 그 실수 뒤에 따라오는 수많은 변명들은 권위주의에 물든 우리사회의 슬픈 자화상을 보는 것만 같다.

영화 <노스 컨츄리>는 언제 개봉했는가 싶게 막을 내렸다. 이처럼 우리사회의 성과 권력에 대한 불감증을 에둘러 꼬집는 영화에 대해 사람들은 아무런 논의가 없었다. 일련의 정치인 성추행 사건들도 어쩌면 <노스 컨츄리>가 슬쩍 기억 속에 사라진 것처럼 잊혀질 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잊는다고 하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다만 이 사회에 사건사고들이 너무 많은 탓이다. 더 큰 사건사고들이 계속 벌어지다간 자칫 이런 생활이 일상화되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렇게되면 사람들은 아예 무관심해질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그걸 조장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