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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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TV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가

D.H.Jung 2006. 7. 26.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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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출동 SOS24>가 경계해야 할 TV의 만용

폭력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법은 너무 멀다. 그래서 이제 방송사가 나선다. 카메라는 이제 폭력이 은밀히 자행되고 있는 사생활 속으로 몰래 들어간다. 그 장면들은 충격적이다. 가족관계에서의 상식의 선은 넘어선 지 오래고, 그것은 상식을 넘었기에 비정상으로 다뤄진다. 21세기에도 불구하고 노예 할아버지, 노예청년, 노예 며느리... 왜 그리도 ‘노예들’은 많은지.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이들을 위해 ‘긴급출동 SOS24’는 이른바 솔루션 위원회를 결성해 각종 해결책을 제시해준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짚어보아야 할 것이 있다. 과연 TV가 이렇듯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TV는 이 시대에 남은 마지막 정의의 기사인 것 같다. 심지어 이런 개개인의 문제들까지 일일이 방송이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는 점에서는 감동마저 온다. 프로그램을 보면서 수도 없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방송마저 없었다면 저들의 삶을 누가 알고 도와줄 수 있었을까.’ ‘저 모래알처럼 구분하기 힘든 그래서 더더욱 보이지 않는 음지의 삶을 비추는 카메라는 이 시대 TV가 해야할 진정한 일이 아닐까.’ 실제로 이 프로그램에서 그런 순기능이 있는 건 사실이다. 시청자들은 바로 그 순기능에 보기에도 괴로운 장면들을 참아내고 그 문제의 해결을 보면서, 안도하게 된다. 저런 프로그램이 있어 여전히 세상은 살만하다고.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프로그램에 왜 논란이 일고 있을까. ‘아들의 벽’ 편에서 패륜아로 그려진 김재현(33·가명)씨는 왜 게시판에 SBS가 편파방송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혹 이 사건은 이 프로그램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닐까.
사회적 문제를 잡아내는 프로그램은 ‘긴급출동 SOS24’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장수 프로그램으로 ‘추적60분’, ‘그것이 알고싶다’, ‘PD 수첩’ 등 역시 사회문제에 메스를 댄다. 그들 프로그램들 역시 간간이 잘못된 취재로 인해 곤욕을 겪기도 했다. 그런데 유독 ‘긴급출동 SOS24’에 그 화살이 집중되는 이유는 뭘까. 그건 아무래도 이 프로그램이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치부되어 온 사생활에 카메라를 들이댔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긴급 출동 SOS24’의 문제 접근 방식은 타 프로그램과 비교했을 때 더 직접적이다. 타 프로그램들은 개인의 문제보다는 거기서 도출되는 사회적 의미 또는 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사회적 문제를 상정하고 다양한 사람들의 문제들을 취재해 문제의 양면을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보여준다. 똑같은 충격적인 장면이 있다 해도 어느 정도 균형점을 찾으려 하는 노력(실제로 그것이 성공하는 지는 별개의 문제다)이 보인다. 하지만 ‘긴급 출동 SOS24’는 바로 개인의 문제로 접근한다. 그것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러다 보니 방안에 CCTV가 설치되고 마치 몰래카메라 같은 선정적인 폭력의 장면들이 고스란히 방영된다. 카메라는 놀라울 정도로 어느 한 방향성을 갖고 접근한다. 거기 등장하는 문제는 악으로서 그려진다. 그것은 절대악이기에 균형 운운하는 잣대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TV의 이런 방향성 있는(?) 방송에는 반드시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특히 이 프로그램은 개인의 사생활을 파고든다는 점에서 만일의 사태가 가져올 파장은 더욱 커진다. 그 위험성은 방송이 가진 편집과 구성에 있다. 방송은 똑같은 내용을 다루더라도 편집과 구성에 따라 그 논지가 180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을 호도할 수 있는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방영된 내용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방송은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또한 TV라는 매체가 가진 일 방향성으로 인해 한 개인에게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죽어야만 죄를 씻을 수 있는 사형수라고 하더라도 변호의 권리는 주어진다. 하지만 지금껏 이 프로그램이 다룬 수많은 가해자들은 아무런 말이 없다. 그들은 대부분 어떤 주장을 펼만한 능력이 없는 알코올중독자, 정신질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희생자라고 주장하는 김재현(33·가명)씨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방송이 보여주고 싶은 대로 자신을 패륜아로 몰고 갔다고 주장한다. 김재현(33·가명)씨의 편파방송 주장은 그 진위여부를 떠나 이 프로그램이 침묵하는 가해자들에게 가해하는 폭력의 힘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 해결책으로 제시된 방송에 노출되는 그 순간부터 사생활은 파괴되는 것이다. 그간 잘못한 게 있으니 당연히 이 정도 폭력은 정당화되는 것 아니냐는 투의 방송편집은 폭력을 근절하겠다는 애초의 기획의도와도 상반되는 것이다.

방송이 해야될 역할은 문제제기가 되어야지 섣부른 결정과 해결책 제시가 돼서는 안 된다. 방송은 양면의 칼날과 같아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때, 다른 한쪽의 그림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또한 방송은 수많은 개인들의 문제를 일일이 해결해줄 수 없다. 그 중 뽑혀진 몇몇 개인들만 수혜를 입을 뿐이다(그게 진정한 수혜인지는 모르는 일이며 받고 싶지 않은 것을 받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개인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이 프로그램의 거창한 기획의도가 말하는 것처럼 실질적인 문제해결을 해주지는 않는다. 아들이 아버지를 폭행하고, 장애인을 노예처럼 부리고, 동생을 오빠가 앵벌이시키는 이러한 현상은 정상적인 사회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해놓으면 얻어질 수 있는 건, 마치 문제가 해결된 것 같은 착각뿐이다. 방송은 개인이 아닌 사회적인 시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그 해결은 정부가 떠 안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