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서울 1945’는 이데올로기와 전쟁 중 본문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서울 1945’는 이데올로기와 전쟁 중

D.H.Jung 2006. 7. 23.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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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1945>와 이데올로기

‘서울 1945’는 현재 이데올로기와 전쟁 중이다.
가까운 근대사를 드라마화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많은 논쟁거리를 낳는다. 예를 들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삼성, 현대가를 다룬 ‘영웅시대’의 조기종영이 그랬다. 이것은 그 때의 역사가 지금 현재까지 바로 영향을 끼치는 근거리에 있어 외압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웅시대’의 극본을 쓴 이환경씨가 다시는 근대사를 드라마로 쓰지 않겠다고 한 것은 바로 그런 어려움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서울 1945’의 경우에도 상황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일제시대의 이야기에서는 잠잠하던 것이 해방 후부터는 시끄러워졌다. 이른바 친일파에 대한 문제와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 등이 불거져 나온 것이다. 이 논쟁에서 우리는 다시 해묵은 ‘좌익과 우익’이라는 괴물을 만나게 된다. ‘좌파적 시각’의 드라마라는 보수언론들의 논평은 다분히 정치적인 색채를 드러낸다.

여기에 지방선거의 완승,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일본의 군사대국화 등등 최근의 국제정세는 우익적인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있다. 대중문화에도 그 바람은 불어닥쳤다. ‘주몽’과 ‘연개소문’에 이어 가을께에 방영될 ‘대조영’, ‘태왕사신기’까지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한 드라마가 준비되고 있고, 강우석 감독의 영화, ‘한반도’는 노골적인 반일감정과 민족주의적 시각을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민족주의 바람에 힘입어서일까. ‘서울 1945’에 대한 좌우논란은 시대착오적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는 듯 하다.

“이 드라마는 이념드라마가 아니다”라고 수 차례 입장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드라마를 한쪽 이념의 호도로 몰아가는 것은 ‘드라마가 가진 이념적 색채의 위험성’ 때문이라기보다는, 다시 구태의연한 좌우논쟁으로 회귀함으로써 얻어지는 특정 집단이나 정파의 이득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최근 ‘서울 1945’를 보면 그것은 명확해진다. 드라마의 논조는 좌익도 우익도 아닌 ‘인간’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이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이게 그 잘난 혁명이었나요. 정녕 이런 것이었다면 나는 반대합니다’라는 투의 대사들이다. 이념의 갈등으로 인해 바로 옆에 있던 이웃을 죽음으로 몰아넣어야 하고, 이제 10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노역을 져야 하는 비인간적 처사에 대한 비판이다. 물론 여기서 죽음으로 몰아넣어지는 인물들은 과거 행적에서 친일파였거나 그만한 죄를 지었던 사람들임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처사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김해경의 어머니로 나오는 고두심은 바로 그런 역할을 해준다. 동우의 아버지 이인평이 인민재판에 서는 장면에서 고두심은 ‘사람 사는 세상’을 외치며 부처 앞에 기도를 한다. 아무리 잘못을 했지만 이인평이 서는 인민재판에 나가는 것을 사람들은 꺼린다. 그것이 휴머니즘에 반하는 행동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김해경 역시 자신이 사랑했던 최운혁에게 ‘이런 혁명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앙상한 이념이 만들어낸 갈등에 대한 휴머니즘적 비판이다.

이러한 대사와 시각을 가진 인물이 고두심이나 김해경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것은 가장 적절해 보인다. 이성적 선택을 강요하는 환경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고, 다음은 연인에 대한 사랑이다. 같은 자식이라도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이 서로를 죽일 수는 없는 것이라는 사고가 고두심이라는 상징적 어머니의 비판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김해경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을 모두 이해하고 보듬어 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념이 아닌 사랑이라는 시각으로 상황을 보기 때문이다. 반면 드라마에서 점점 악역으로 변하고 있는 최운혁의 친구, 오철형이나 김해경의 동생 김연경은 이념에 점점 눈이 멀어 가는 사람들이다. 드라마는 ‘이념 VS 사랑’의 대결구도를 보인다.

‘서울 1945’가 드라마 상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특정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 그 자체이다. 그런데 이 이데올로기는 사실 구시대적 유물이다. 1990년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는 탈냉전, 탈이념 시대의 도래를 말해준다. 따라서 이러한 이념 논쟁은 진부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1945’가 이제는 구시대의 산물인 이데올로기 자체(좌든 우든)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거꾸로 지금의 사회가 아직도 이 구태의연한 논쟁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지금 현재 우리 사회는 여전히 보혁 갈등과 좌우 갈등이 남아있다. 같은 집안에서도 어르신들의 입장이 틀리고 자식들의 입장이 틀리다. 어르신들은 좌파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를 갈 정도이고, 자식들은 그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서울 1945’가 이 시대적 아픔에 대해 내놓는 대안은 이념이 달라도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는 그 어르신과 자식간에 남은 사랑이다. 약간 단선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은 현재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은 갈등의 골이 그만큼 깊다는 반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