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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네모난 세상

인순이, 그 이름은 나를 찾는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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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인순이, 극중 박인순 그리고 모두의 인순이

편견을 넘어 날아간 거위, 인순이
그녀는 혼혈아다. 물론 자신이 선택한 일은 아니지만 사회는 그녀를 냉대했다. 피부색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게다가 그녀는 제대로 공부를 하지도 못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것이 전부. 고등학교는 그녀의 꿈이었다. 노래를 한다는 것도 그 당시엔 딴따라라 불리는 또 하나의 비아냥이었다. 피부색, 인종, 학력, 직업. 그녀는 우리네 사회가 가진 모든 편견을 다 받아내야 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포기하려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노래가 있었다. 때론 아픔을 달래주고 때론 그 아픈 마음을 타인에게 전해주는 노래. 그녀는 노래에 자신의 삶과 열정을 고스란히 담아 세상에 날려보냈다. 그런데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편견으로 가득한 이 사회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기 시작한 것이다. 혼혈아가 아니고, 못 배운 중졸 혹은 딴따라가 아닌 인순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그녀의 마음이 담긴 노래는 세상의 편견을 녹이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녀가 부른 ‘거위의 꿈’은 10년 전, 이적이 만들고 불렀던 곡이지만, 긴 시간을 돌아 노래 주인을 찾아왔고, 덕지덕지 편견의 족쇄에 묶인 채 날지 못했던 거위는 세상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 그녀가 날자 세상 저편에서 푸드득하고 변화의 날갯짓 소리가 메아리로 울려왔다.

전과자도 스타도 아닌 자기 이름 박인순
같은 이름을 가진 KBS 드라마 ‘인순이는 예쁘다’에서 인순이는 전과자다. 고등학교 때 실수로 친구를 죽였다는 죄로(물론 후에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지만) 교도소에도 갔다. 긴 수감생활 끝에 수갑을 벗고 사회에 나왔지만 사회는 그 수갑을 벗겨주지 않았다. 엄마도 없고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정붙일 곳 없는 처지에 직업마저도 가질 수 없는 절망감 속에서 자살을 선택하려 하지만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그 누구도 불러주지 않을 것 같던 자신의 이름을 누군가 부른 것이다. 그는 다름 아닌 어린 시절 둘도 없는 친구 상우다.

상우를 통해 다시 살게된 인순이는 어린 시절 자신을 떠났던 엄마를 다시 만나 새 삶을 시작하지만 편견은 바깥 세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전과자라는 사실을 엄마조차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선택하려던 자살. 그 때 두 번째 기적이 일어난다. 플랫폼 밑으로 떨어진 취객을 구하게된 인순이는 순식간에 ‘지하철녀’란 이름으로 스타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인순이가 불려지길 원하는 이름은 전과자도 아니고 스타도 아니다. 그저 자기 이름 박인순일 뿐이다.

두 인순이가 만나는 순간, ‘거위의 꿈’
‘인순이는 예쁘다’에서 이 두 인순이가 만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지하철녀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박인순이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가수 인순이의 ‘거위의 꿈’을 부를 때이다. 노래는 형편없다 못해 방송사고 수준. 짤막하게 부르고 끝냈어야 할 그 노래를 그녀는 끝까지 불러버린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그만’ 끝까지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노래부르게 했을까.

이 ‘나도 모르게 그만’은 그러나 드라마 속 음치인 박인순에게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다. 그것은 노래 잘하기로 소문난 그녀, 가수 인순이에게서도 벌어졌다. 지난해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의 일이다. 조금은 피곤한 듯한 얼굴과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꿈은 이루어진다. 노력하는 자한테만. 여러분, 꿈을 꾸십시오. 꿈을 이루십시오. 그리고 꿈을 지키십시오. 그리고 꿈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곤 시작된 ‘거위의 꿈’. 그녀는 음악 자체에 푹 빠진 채 노래를 열창했다. 그러다 “이 무거운 세상도-”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만 짧은 순간 음을 놓쳤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서였을 것이다. 그 노래를 하는 그 때 그녀는 이 짧은 노래 속에서 수십 년 간 ‘자신을 묶어두었던 무거운 세상’을 느꼈을 것이다. 차마 눈물을 보이지 못해 담담히 인사하고 불빛이 쏟아지는 무대 밖으로 나갈 때 언뜻 눈물을 훔치는 그녀의 모습이 실루엣으로 잡혔다.

인순이는 정말 예쁘다
드라마 속 박인순을 엉망이지만 끝까지 노래하게 한 것도, 가수 인순이가 노래에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담아 노래를 하다 끝내 음정을 놓치고 눈물을 흘리게 한 것도 모두 그 ‘거위의 꿈’이 전하는 진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상의 편견에 찢겨지고 남루해도 보물처럼 간직했던 꿈, 누군가 뜻 모를 비웃음을 날리기도 했던 꿈, 이미 바꿀 수 없는 운명 같은 현실 속에서 사람들이 헛된 것이라고, 독이 될 뿐이라고 말하던 꿈. 그 꿈 하나 부여잡고, 벽처럼 서 있는 편견 가득한 무거운 세상 앞에 서 있는 자신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순이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또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복잡한 현대사회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꿈을 갖고 그것을 이루려 살아가던 자기 자신의 모습에서 점점 멀어져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꿈은 멀고 현실은 너무나 무겁기에 우리는 종종 자격지심과 우월감으로 ‘꿈을 가진 나’를 버리려 한다. 그 나를 폄하하거나 과장하려 한다. 그럴 때면 한번쯤 자신으로 돌아와 남루한 실력이나마 자신만의 ‘거위의 꿈’을 불러보는 건 어떨까.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인순이’는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인순이는 정말 예쁘다.
(위 글은 '한국원자력연구원 사보 '원우'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