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보다 무서운 건 시대의 억압이다
돌아온 ‘전설의 고향’의 귀신들은 과거와 비교해서 달라진 점이 없다. 그럼에도 그토록 무서웠던 귀신들이 무섭지 않고, 오히려 예쁘고 심지어는 슬프게 보여진 이유는 무얼까. 그것은 귀신이 태어났던 시대와 지금의 시대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설의 고향’의 귀신들의 면면을 보면 저마다 탄생의 이유를 갖고 있다. ‘구미호’는 당대 가부장적 사회에 대해 도발로써 탄생한 것이며, ‘아가야 청산가자’의 아기를 억울하게 읽게된 어미 귀신은 가진 자에 의해 아기마저 빼앗기는 못 가진 자의 처지를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어미의 모성애와 연결시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사진검의 저주’는 왕권을 지탱하기 위해 핍박받은(인신공양의 제물이 된) 자가 귀신으로 탄생하고, ‘오구도령’은 어찌할 길 없는 전염병 앞에 억울하게 죽었을 민초들이 귀신으로 환생한다. ‘기방괴담’은 여성, 그것도 기생이라는 신분이 가진 사회적 억압이 귀신으로 화하며, ‘환향녀’는 여성들에게 강요되었던 순결과 정조에 의해 살아 돌아온 자들을 다시 죽음으로 내모는 상황이 귀신을 탄생하게 한다.
따라서 ‘전설의 고향’의 귀신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회적인 억압의 대상들이다. 그렇게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사연은 이야기 속으로 들어와 그 억압을 풀어헤치려 하고 그 안전한 방법은 귀신을 선택하게 된 것. 귀신의 행위 하나하나는 그저 표피적으로 누군가를 무섭게 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억압된 감정의 표현이다. 그리고 그 표현을 누군가 듣고 이해하게 됐을 때, 귀신의 저주는 끝이 난다.
귀신들이 무섭지 않은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귀신들은 누군가를 해코지하기 위해 무차별적인 보복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고 그 억울함을 토로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뿐이다. 바로 이런 귀신에 대한 이해는 그 공포의 존재를 동정의 대상으로 바꾸어놓는다. 이는 거꾸로 뒤집어 생각하면 귀신이 그토록 두려운 것은 그 불가해한 존재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설의 고향’이 탄생했던 70년대 말과 21세기는 그만큼 시대적인 간극이 넓다. 현대이지만 여전히 가부장적 가치체계가 그대로였던 70년대 말, 사회적 억압은 여전했고 그 속에서 귀신은 공포의 존재일 수 있었다.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그 귀신들은 억압하는 자들의 내부 속에 감춰진 죄의식을 끄집어내기에 충분했고, 억압된 자들의 한을 위무해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이 귀신들의 억압은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물론 과거 억압의 기억을 갖고 있는 중ㆍ장년층이라면 향수 어린 시선으로 그 귀신들의 통쾌 살벌한 이야기 속에 빠져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세대들에게 이 귀신들의 사연은 옛이야기 속의 하나일 뿐, 현재진행형의 울림을 주지는 못한다. 따라서 ‘전설의 고향’은 더 이상 ‘무서운 귀신 이야기’의 대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이제 말 그대로의 전설, 즉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머문다. 굳이 ‘전설의 고향’을 가지고 공포극이라 규정지을 필요가 있을까. 공포가 아니라도 귀신이야기가 아니라도 전설은 그 자체로 옛이야기의 재미를 선사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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