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화원’은 바람 같은 작품”
이런 인터뷰는 처음이다. 아니 이건 인터뷰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강남의 한 찻집에서 그를 만났고 차를 마시며 ‘바람의 화원’에 대해 이야기했다. 개인적인 사생활을 중시해 인터뷰를 극도로 꺼린다는 ‘바람의 화원’의 이정명 작가를 만나기 위해 필자는 사진기와 녹음기, 심지어는 노트까지 포기했다. 대신 이야기를 들을 작정이었다. 그러니 이 글은 애초부터 인터뷰 형식에 앉혀질 운명이 아니었다. 다만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 바람처럼 떠다니는 이정명 작가의 이야기, 그 단편들을 적어놓은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이 막연함 속에서 이정명 작가가 신윤복의 그림을 앞에 두고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상상하며 느꼈을 막막함과 또 그 속의 어떤 설렘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첫 인상, 성냥갑에 그려진 신윤복의 ‘단오풍정’
이 불황에, 그것도 한번도 불황 아닌 적이 없었던 출판계에서 꾸준히 베스트셀러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이정명 작가의 첫인상은 의외로 평범하다는 것이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보게 되는 그런 사람, 마치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 속 그저 지나가는 행인 같은 평범함을 간직한. 하지만 환하게 웃으며 동그란 안경 너머로 진지하게 쳐다보는 그 눈빛은 ‘바람의 화원’의 애체를 끼고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는 김홍도를 닮았다. 어딘지 빈 듯 보이지만 막상 작품 앞에 서면 특유의 열정 속으로 빠져드는 그런 사람.
그의 첫인상이 익숙해질 즈음, 그가 신윤복이란 화원을 접하게된 첫인상이 궁금해졌다. “처음 신윤복을 접한 건 아주 어렸을 적 성냥갑에 그려진 여인이 그네를 타는 그림에서였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신윤복 작품 중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그림, ‘단오풍정(端午風情)’이었다. 그 그림의 여성적으로 보일 만큼 섬세한 필치와 색감을 보면서 어린 미래의 작가는 그 그림의 화원을 여성으로 상상해왔다고 했다. 오히려 나중에 그 화원인 신윤복이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랄 정도로.
그림은 그리움, 그 그리움을 이야기로 엮다
“그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이 김홍도의 질문에 도화서 생도인 신윤복은 이렇게 말한다.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지요?” ‘바람의 화원’에 등장하는 이 대화는 또한 이정명 작가가 이 작품을 어떻게 써나갔는지를 보여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연대기적으로 신윤복의 삶을 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그림들이었다.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 속에 담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했다. 그림을 앞에 놓고 그 속에 있는 인물들이 말해주는 것을 그리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상상하는 작가의 눈길이 느껴졌다.
“서양화에는 그림만큼 유명한 일화들도 많이 내려오고 있죠. 그 이야기들이 모두 역사적인 사실은 아닐지 몰라도 그것들은 그림을 더욱 풍요롭게 해줍니다.” 작가는 우리네 그림들 속에 숨겨져 있을 지도 모르는 그런 일화를 찾아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정명 작가가 밝힌 ‘바람의 화원’의 작법은 그림들이 말해주는 그 이야기를 듣고 짧은 이야기들을 구성과 상관없이 적어두는 것이었다. 사실상 작가의 전작인 ‘뿌리깊은 나무(2006)’보다 더 먼저 이 작품에 대한 구상과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하니 꽤 오랜 시간 켜켜이 쌓여진 메모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그 메모만큼 쌓여진 그리움은 다시 작품으로 꿰어졌을 터였다.
드라마가 소설보다 좋은 이유
“이 작품은 장태유 PD가 아니면 어려운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이정명 작가의 장태유 PD에 대한 신뢰는 깊었다. 장태유 PD 특유의 미술적인 감각은 물론이고, 특유의 완성도에 대한 근성은 남다르다고 한다. 이것은 작품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는 점이기도 하다. 특히 이정명 작가는 사실 별로 드라마에 대해 상의를 한 적도 없지만, 자신의 생각과 장태유 PD의 생각이 딱 맞아떨어지는 장면들을 드라마를 통해 확인하면서 전율했다고 한다. “김홍도의 캐릭터를 생각할 때, 조금은 허술한 듯 보이면서도 작업에 들어가면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을 보이는 그런 인물로 그려졌으면 하고 생각”했다는 이정명 작가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장태유 PD는 그렇게 그려냈다고 한다.
무엇보다 드라마가 소설보다 낫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소설에서는 군더더기로 생각되어 사용하지 않았던) 그 일상적이고 가벼운 대화 같은 것들이 오히려 드라마에서는 리얼리티를 강화해준다는 점이라고 이정명 작가는 밝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장PD를 신뢰하는 것은 아마도 작가가 이미 밝혔던 ‘그림 속의 이야기에 대한 매혹’을 드라마가 실제 영상으로 구현해냈다는 점일 것이다. ‘단오풍정’ 그림 속의 아낙네들은 드라마 속으로 걸어나와 신윤복을 만나고, 드라마는 신윤복이 그 그림을 그리게 되는 상상의 이야기를 눈앞에 그려낸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이정명 작가의 겸손일 지도 모른다. 소설 속에는 또한 드라마가 보여주지 못하는 또 다른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보다 소설이 좋은 이유
“팩션은 역사소설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역사에 추리가 들어가는 하나의 장르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하죠. 굳이 말하자면 팩션은 역사추리에 가깝습니다.” 이정명 작가는 최근 영상 컨텐츠로 각광받고 있는 팩션이 그저 말 그대로의 팩트(사실)+픽션(상상)의 결합체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바로 잡아주었다. 팩션은 저 ‘장미의 이름’처럼 역사적인 팩트를 추리형식으로 파고 들어가는 하나의 특정한 장르라는 것이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과 소설 ‘바람의 화원’이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 팩션이라는 장르의 성격으로 규정되는 추리형식이 소설 속에 더 많이 구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직 드라마가 반 정도만 진행되어 있어 후반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나, 현재까지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추리형식보다는 신윤복이라는 인물의 화원으로서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드라마와는 달리 소설은 팩션 특유의 추리가 주는 묘미가 특별한 재미를 선사한다.
신윤복 신드롬? 바람으로 끝나지 않길
“매체의 힘을 느꼈지요.” 드라마화 되면서 불기 시작한 신윤복 신드롬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운을 뗐다.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즐거운 비명을 질렀던 간송미술관은 신윤복 신드롬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신드롬은 현재 개봉을 준비중인 영화 ‘미인도’를 통해 또 한번 이어질 태세다. 하지만 이런 신드롬에 대해서 작가는 신중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이런 신드롬은 금세 언제 그랬냐 싶게 사라지는 것이 우리네 생리죠. 제발 한 때의 바람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 그림에 대한 관심으로 꾸준히 이어지길 바랍니다.”
‘바람의 화원’은 그 제목처럼 손아귀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바람 같은 작품이라고 작가는 밝혔다. 드라마 속에 드러나는 인물들 간의 사랑은 사제지간(김홍도)의 정인지, 형제지간(신영복)의 우애인지, 혹은 예술가가 갖는 미의 화신, 즉 뮤즈(정향)에 대한 사랑인지 모든 것이 복합적이고 애매모호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바로 그런 점이 ‘바람의 화원’만이 주는 독특한 아우라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그림자처럼 보이고, 때로는 실체처럼 보이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김홍도가 어진화사 앞에서 신윤복의 그림자에 매혹되면서 느꼈던 그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작품과 작가는 닮는다더니, 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바람의 화원’과 이정명 작가는 서로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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