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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노희경이 사랑하는 그들, 그리고 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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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캐릭터를 사랑한다는 건

작가가 캐릭터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자기가 만들어낸 인물이니 작가들은 모두 자신의 캐릭터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작금의 드라마들을 펼쳐놓고 보면 이 당연한 질문에 당연하게 “그렇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에덴의 동쪽’의 신태환(조민기)같은 악마의 화신이나 ‘타짜’의 정말 이름에 걸맞는 욕망의 포식자, 아귀(김갑수) 같은 인물을 두고 작가가 얼마만큼 이 캐릭터를 사랑하는가를 묻는다면 어떨까.

악역, 조역 가리지 않는 사랑
이것은 굳이 이들이 악역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똑같은 악역이라도 그가 왜 그런 악을 저지르기 시작했는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그 역할은 살아있는 존재라기보다는 그저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기 쉽다. 아쉽게도 신태환이나 아귀 같은 캐릭터는 그저 등장하면서부터 악역일 뿐, 그들이 왜 그렇게 악랄해졌는지 또 그들의 인간적인 고민은 무엇인지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적인 고민을 하지 않는 존재로서의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이런 경우 이들은 주인공을 위한 소품이 되기 쉽다.

악역은 단지 작가의 캐릭터에 대한 애정도를 드러내주는 단적인 예일 뿐이다. 절대악은 없어도 온통 주역에게만 시선이 머무는 드라마 역시 같은 범주에 들어간다. 조역들은 모두 주역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그런 드라마들 속에서 작가의 캐릭터 하나하나에 대한 사랑은 느껴질 수가 없다. 이렇게 되면 드라마 속 캐릭터들은 자연스럽게 살아있지가 않고 억지로 만들어진 설정 속에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게 된다. 흔히들 ‘악역 없는 드라마’라는 말로 불리는 노희경 작가의 작품이 유독 조역에까지 세세한 배려를 하는 것은, 실제로 드라마를 살아있게 만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캐릭터에 대한 사랑은 드라마를 살린다.

‘그들이 사는 세상’이 남다른 이유
‘그들이 사는 세상’의 캐릭터들에 대한 노희경 작가의 사랑은 유독 남다른 것 같다. 그녀는 이미 ‘굿바이 솔로’에서 다중스토리 구조를 통해 한두 명의 주인공의 이야기가 아닌 10여 명에 가까운 캐릭터들을 모두 주인공의 이야기로 끌어 모은 전적이 있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 물론 약간씩의 비중은 다르겠지만 등장인물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거의 공평하게 주어진다. ‘그들이 사는 세상’이 그녀에게 각별한 것은 바로 그 모두가 주인공만큼의 애정으로 그려지는 이 드라마 속에서의 ‘그들’이 단지 대본 속의 캐릭터가 아니라, 바로 노희경 작가의 현실, 즉 그녀와 함께 일해왔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거의 한 회 분의 이야기를 채워 넣은 늙은 배우들에 대한 에피소드는 단적인 예다. 나이 들어감을 한탄하고 달라지는 세태를 개탄하면서도 그 젊은 세대들을 귀엽게 바라보고, 또 그들끼리 서로 외롭고 힘든 처지를 위무하는 장면들은 평소 노희경 작가가 그들을 얼마나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던가를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이것은 드라마 중간 중간에 짤막한 에피소드들 속에 등장하는 스텝들의 대사들 속에도 들어가 있다.

힘겹게 몇 번씩이나 다시 찍고 찍기를 반복하면서도 PD의 “죄송하다. 다시 한번만 가겠다.”는 말만으로도 그저 충분한 카메라 감독, 만날 구박을 당하면서도 할 말은 똑 부러지게 다 하는 보조작가, 늘 화려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 남다른 아픔을 품고 사는 윤영(배종옥)같은 주연배우, 그리고 무엇보다 화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현장에서 구르고, 철야를 밥먹듯이 하는 PD들에게 모두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반면 상대적으로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작가, 이서우(김여진)는 드라마 속에서 이렇게 어렵게 고군분투하는 이들을 보조적으로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 전면에 나서지는 않는다. 실제 상황은 많이 다르겠지만(어쩌면 노희경 작가에겐 같을 지도!) 아마도 노희경 작가는 작품 속에서나마 작가라는 위치를 한껏 낮춰 다른 이들을 주목시켜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사랑하는 그들은 바로 우리들이다
작가가 그 캐릭터를 사랑하는데 어떻게 악역이 생길 수 있을까. 재수 없는 손규호(엄기준)도 남모르는 아픔이 있다는 게 느껴지고, 고압적인 원로배우인 오민숙(윤여정) 역시 표현되지 않는 귀여움이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이런 면모는 단선 적인 악역을 세워두고, 작가 마음대로 캐릭터를 움직이는 그런 드라마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시청률을 위해서 드라마 속 인물 하나쯤은 손쉽게 죽여버리는 요즘 세태에 노희경 작가의 이 사랑은 시사하는 바가 그만큼 크다.

사람들 간의 피상적인 이해는 서로를 넘어야할 적으로만 간주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한 꺼풀을 벗기고 좀더 이해의 폭 안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는 상대방이 역시 나와 같은 부족한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된다. 노희경 작가는 바로 그것, 즉 인간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는 것 같다. 작가가 캐릭터를 사랑한다는 것은 한 세계의 구성원을 그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녀가 사랑하는 그들은 다름 아닌 우리들이고, 그녀가 사랑하는 그 세상은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