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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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행시’에 이은 ‘가을로’, 멜로는 진화 중

D.H.Jung 2006. 11. 4.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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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로’는 사회적인 멜로

멜로 영화가 달라졌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하 우행시)’에서 시작된 멜로의 변신은 김대승 감독의 ‘가을로’로 이어지면서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멜로 드라마’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가고 있다.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와 자살시도를 해온 여교수의 사랑을 그린 ‘우행시’. 이 멜로드라마는 그 기저에 ‘사형제도’폐지 논란의 불씨를 심어두었다. ‘가을로’ 역시 마찬가지. 이 영화는 잃어버린 사랑과 상처, 그 치유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이라는 사회적 메시지를 끌어안았다. 이 사회극과 멜로의 중간쯤에 위치한 영화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멜로 드라마라는 전통적인 장치에다 사회적 공감까지 얻어내려는 시도일까. 혹은 사회극의 무거움을 멜로 드라마의 감상으로 중화시키려는 의도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혹 개인적 차원의 멜로가 사회적 코드 안에서 읽히는 확장된 멜로의 결과일까.

멜로+사회적 공감, 두 마리 토끼 잡기
‘우행시’의 절묘함은 그것이 사회적 코드를 끝까지 쥐고 가면서 동시에 신파라는 전통적 코드 또한 버리지 않았다는 데 있다. 관객들은 눈물을 흘리는데 그것이 사회적 공감 때문인지, 신파 때문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즉 ‘우행시’에서 흐르는 눈물에는 여러 층위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멜로와 사회극은 웬만해서는 한 몸이 되기가 어렵다. 멜로로 흐르다보면 자칫 감정 과잉이 되기 쉽고, 사회극으로 흐르다보면 너무 이성적으로 되기 쉽기 때문이다. 두 마리 토끼 잡기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우행시’는 보기 좋게 그 성공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사실 그 눈물이 관습적 장면이 만들어낸 신파로 강요된 것이라 하더라도, 영화가 제시한 사회적 공감의 틀 안에서 용서해주었다.

‘우행시’가 멜로와 사회극 사이에서 멜로 쪽에 더 무게중심을 두었다면 ‘가을로’는 사회극쪽에 더 무게를 준다. 대부분의 영화평이나 영화 소개는 이 영화가 이번 가을의 대표적 멜로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 영화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멜로와는 다르다.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고 그들이 사랑하고 헤어지고 그 아픔과 상처를 이겨내는 그것은 멜로로 읽히지만 영화의 전체를 장악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느 날 갑자기 그들 앞에 벌어진 재난이다. 만일 이 재난이 천재지변이나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운명(예를 들면 불치병 같은)이었다면 이 영화는 온전히 멜로의 틀을 가져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천재가 아니고 인재인 데다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이다.

한 인간의 죽음을 대하면서 겪을 수 있는 반응으로 정신분석학에서는 애도, 분노, 죄의식, 공포와 불안, 피해의식 등을 꼽는데, 살아남은 최현우(유지태 분)는 분노의 반응을, 윤세진(엄지원 분)은 공포의 반응을 보인다. 정상적인 멜로의 상황이라면 죽음을 겪은 주인공은 이러한 반응들을 거처 결국에는 긍정의 상태에 이르렀을 것이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상황에 그들은 여전히 분노와 공포 속에 놓여있다.

본래 말하고 싶었던 것은 분노
감독이 영화 시사회에서 ‘분노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밝혔듯이 이 영화는 분노, 즉 하루아침에 수많은 삶을 앗아가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정부와 사회를 통틀어 벌어지는 총체적인 불감증에 대한 분노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분노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다큐멘터리나 시사고발 프로그램이지 영화가 할 일은 아니다. 김대승 감독은 이 사회적인 부조리와 거기서 발생하는 분노 끝에 멜로를 붙여 작품으로 만들어낸다. 이렇게 되자 멜로와 사회극의 경계가 절묘하게 무너져 내린다. 영화는 최현우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그가 서민주(김지수 분)를 잃었던 그 상처의 치유과정을 보여주지만, 그 과정을 통해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깊은 심연 속에 묻어두었던 분노를 끄집어내고, 그 분노를 다시 삭이며 치유하게 된다(그것이 미완의 치유일지라도).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되는 멜로
영화 ‘가을로’는 개인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멜로의 일반적인 틀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시킨 영화이다.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사회적 멜로’라고나 할까. 이 사회적 멜로는 저 ‘우행시’에서 먼저 선을 보인 바 있고, ‘가을로’에서 더 깊어졌다. ‘우행시’가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하는데 있어서 멜로의 코드를 과용해 무언가 화장기가 가득했다면, ‘가을로’는 화장기 없앤 보다 다큐적인 접근을 한 본격 사회적 멜로가 될 것이다. 이 이른바 사회적 멜로가 갖는 힘은 바로 연애감정에서 오는 감정적 발로의 차원에 머물던 개인적 멜로에서, ‘사회적 공감’의 차원으로 보다 확장된 멜로를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이런 시도의 위험성도 존재한다. 그것은 멜로가 가진 어쩔 수 없는 한계인 감정적 해결의 문제이다. 사회적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까지는 긍정적 역할을 해내지만, 그것의 해결에 있어서 너무나 미완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을, ‘가을로’라는 영화의 시도가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네 사회가 오래도록 빠져있어 도저히 깨어날 것 같지 않은 사회적 불감증을 다시 환기시켜주는데 어쨌든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을로’는 마치 너무나 끔찍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멜로라는 틀을 빌려 부드럽게 끄집어내고 있다. 만일 영화를 보면서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는 장면에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동안 스스로 묻어버린 분노의 한 조각을 찾아냈다는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